하나님의 한 의 (로마서 3:21-26)
20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우리의 죄를 인식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 답을 히4:12-23절이 전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환히 비추는 거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그 보이지 않는 것들, 숨겨져 있는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껏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실하게 서본 적이 없는 사람들임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얼마만큼 나느냐?”에 따라 어떤 길을 택할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통감했다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 어떻게 인도해 주시고 어떤 은총을 내려 주시는지 해답을 주기위해, 오늘 본문이 “이제는”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았다면, 이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22절을 읽겠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롬1:17절에서 배웠던 “이신칭의”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의”를 말합니다.
“의”를 신학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면 “바른 관계”입니다.
이 정의는 세상에서도 똑같이 통용됩니다.
세상에서 “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다.”고 이야기할 때, 그 판단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가 “어떤 관계를 맺느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판단하는 의의 기준은, 상대적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의인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불의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의사”라고 부르지만, 일본 사람들은 “폭도”라고 부릅니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도 우리는 “우리나라의 자주권을 빼앗은 원흉”으로 치부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근대 일본의 아버지이자 위대한 선각자”로 평가합니다.
이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의의 기준은, 영원히 변치 않으며 절대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끊임없이 차별합니다.
그리고 늘 과거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하는, 과거의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합니다.
또한 편견을 가지고 그 사람의 현재 모습을, 자꾸 왜곡시키고 제한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차별 없이” 하나님의 의를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의가 없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조차 없습니다.
그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마1:1-6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위의 계보에서 4명의 여자가 나오는데, 첫 번째는 “다말”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한 부도덕한 여인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라합”으로 기생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룻”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개로 여김 받은 이방의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네 번째는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입니다.
결혼한 여자라면, 왕이 동침을 요구하더라도 죽을 각오로 거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밧세바는 다윗왕의 청을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갖게 된 것을, 남편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다윗에게만 이야기 했습니다.
남편이 죽은 뒤에는,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남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네 명을 든다면, 첫 번째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인 무책임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장자의 권한을 가로챈 사기꾼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정욕을 위해 충신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솔로몬”은 처첩을 1천 명이나 두었던 희대의 탕자였습니다.
따라서 율법으로 따지면, 이상 여덟 명은 절대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두 다 죽어야 마땅합니다.
크나큰 죄를 지은 사람들인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모두 다 멸망당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이름들이 모두 다 그리스도의 족보에 영광스럽게 올라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기생이었던, 탕자였든, 사기꾼이었든, 살인자였든, 차별 없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로 인해, 우리들도 오늘 바로 이 자리에 나와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24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란 그야말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까?
말틴 루터가 성경을 읽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나를 포함해 세상 사람들을 다 멸망시키겠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보니 죽지 않아야 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도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은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은, 값을 측량할 수 없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주어진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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