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된 바 (로마서 3:9-20)
10절에서 바울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말하면서, 우리가 다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그 죄인 됨의 논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내용에서 두 가지 사실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울의 진지한 태도입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그의 밑에서 배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깨달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생각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에서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돌아다녔습니까?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볼 때 “갈릴리 출신의 초라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이 선을 이루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곁길로 빠져버린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3-14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바리새인들은 입만 열면 율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겉과 속이 다른 거짓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15-18절을 읽겠습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그런데 바울의 경우,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러 다닐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15-18절의 내용이 “자기와 상관없다.”고 부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을 근거로 우리는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울의 진지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향한 말씀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입니다.
10-18절까지는, 시14:1-3절과 렘5:16절, 잠1:16절, 사59:7-8절 등 구약성경 가운데 열 군데에서 뽑아 인용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때에는, 오늘날과 같은 성경이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양가죽에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하여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하고 사용했습니다.
성경의 장절도 없었습니다.
1228년에 스티븐 랭턴이, 성경에 장을 붙였고, 1448년에는 나탄이 구약에 절을 붙였으며, 1551년에 로버트 스테파누스가 신약에 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처럼, 장절이 명기된 성경이 처음 출판된 때가 1560년입니다.
그 이전에는 일반인들이 성경을 소유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양가죽 성경을 가지고 있다 해도 특정 말씀이 어디에 있는지 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구약성경에서 죄인에 대해 전하고 있는 말씀들을, 정확하게 뽑아 논거로 사용한 것입니다.
더욱이 전설에 의하면, 바울은 안질로 인해 시력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처해 있던 악조건 속에서 이와 같은 작업을 해냈다는 것은, 바울이 말씀에 대해 얼마나 통달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함과 해박함으로 스스로 의인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에서,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영적인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과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다니던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달달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요?
첫째는, 입장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읽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므로 “어떤 입장에서 읽느냐?”가 중요합니다.
같은 성경을 놓고, 왜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로 나뉩니까?
왜 교파가 나뉘고 접점을 못 찾습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자기가 서 있는 입장에서 말씀을 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전에는 어떤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바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았습니다.
로마서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율법주의자는 “철저하게 형식만을 강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형식에 어긋나면 가차 없이 “x”라고 판단합니다.
이런 사람은 답은 잘 알지만, 본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o,x”로 가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 단계를 지나면 “o,x”를 가리는 것은, 초보적인 수준일 뿐이고, 어떻게 하면 “삶을 더욱 주님의 뜻대로 완성시켜 나가느냐?”하는 본질적 문제가 대두됩니다.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면 이 본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 입장에서 아무리 성경을 읽는다 해도, 얼굴 표정은 바뀔 수 있을지언정 속마음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질과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입장”을 버리는 자세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내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말씀을 읽는다.”해도,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울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 이상이 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성령의 조명아래 있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한 지식적으로 박사였으나, 그 말씀이 바울에게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영을 만나자, 그 말씀은 바울 자신의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토록 자신을 의인이라고 확신했던 바울이 이 말씀 앞에서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딤전1:15절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조명아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구원을 간구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과 관련해 우리는 중요한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고, 주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드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을 통해 여러 가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온갖 병자가 나았습니다.
그런데 바울 자신이 쓴 많은 서신들에서 자기가 베풀었던 능력에 대해 자기 입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수행했던 의사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만 해당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는 신비스러운 영적 체험을 하였지만,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그의 이름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또 바울은 누구보다 방언에 통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교회에 덕을 끼치지 않으면, 방언을 자제할 것을 권했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과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바울이 성령의 능력으로 어떤 일에 집중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성령의 열매 맺음으로 지속적으로 거듭난 삶을 사는 것이고, 지속적으로 거듭난 삶은 오직 말씀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참 좋은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더 큰 믿음을 갖게 해줍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에서는, 성령의 은사가 필요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쫓아낼 귀신도 없고, 고쳐야할 질병도 없고, 방언도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진정으로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수용하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받아도 말씀 속에서 말씀을 이해하고 수용하는데 성령의 능력을 쏟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고 넘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지한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집중한다.”는 것은, “말씀 앞에서 진지한 태도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믿음과 신실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 말씀 앞에 신실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말씀이 주어지든지 그 말씀 앞에 온전히 나를 내려놓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해박해져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진지함이, 말씀에 대한 “깊이”에 관한 것이라면, 말씀에 대한 해박함은 “넓이“에 해당합니다.
주어진 말씀을 잡고 깊이 있게 묵상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자칫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깊이와 넓이를 챙길 때, 비로소 신앙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삶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영적으로 함께 하시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이 땅에서부터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는 삶, 이미 천국에 거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에는, 범사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하시는 손길을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을 변화시켜 가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둘러싼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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