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하나님의 한 의(2) (로마서 3:21-26)

Johnangel 2024. 9. 5. 09:17

하나님의 한 의(2) (로마서 3:21-26)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허락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은혜입니다.

 

24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란, 그야말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까?

말틴 루터는, 성경을 읽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나를 포함해 세상 사람들을 다 멸하겠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보니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도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랑입니다.

우리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시기에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24절에 나오는 “속량”이라는 단어는 “노예시장에서 노예를 산 뒤 노예증서를 찢고서 그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그 노예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못합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방법으로 속량의 은혜를 내려 주신 것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제물로 삼으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집니다.

 

25절을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가로 했습니다.

제물이라는 단어는, 제사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고상한 단어지만, 제물로 바쳐지는 입장에서는 끔찍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어떻게 제물을 드렸습니까?

제물이 동물일 경우, 목을 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뿌렸습니다.

그리고 가죽을 벗기고는 각을 떴는데, 그 살을 찢을 수 있을 만큼 다 찢어소, 완전히 불에 태웠습니다.

제물을 곡물로 드릴 때는, 곡물을 절구에 넣고 빻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렇게 재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더구나 “화목제물”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화목제에는 감사제, 낙헌제, 서원제가 있습니다.

화목제의 특징은, 다른 제사와 달리 하나님께 소의 기름과 콩팥을 불살라 드린 뒤,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는 제사장들이 취하고, 그 나머지는 제사를 올린 사람이 하루 이내에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낙헌제와 세원제인 경우에는 이틀 이내에 이웃과 나누어 먹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정한 기일 내에 그 고기가 남아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린 사람이 오히려 화를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규정을 주셨겠습니까?

이런 규정이 없으면, 아마 내가 좋아하는 친구나 친한 이웃들과만 나누어 먹을 것입니다.

그것도 내 배가 부를 때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규정이 있으면, 네가 미워하는 사람과도 나누어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 한 마리를 언제 다 먹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화목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화목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피를 뿌리고 당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헐고 화목”을 세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귀한 독생자를 어찌 이토록 무참하게 죽게 하신 것입니까?

그만큼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는 저와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고백인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집니다.

 

25절에 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라고 하셨습니다.

참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통입니다.

인내와 고통은 같은 말입니다.

왜 우리가 끝까지 참지 못하고 종종 벌컥 화를 냅니까?

성격이 급한 것은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오래 참으실 수 있습니까?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우리에 대한 그 사랑으로 참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시에 하나님께서는 고통과 참으심으로써,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의”를 허락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4.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난 죄를 간과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집니다.

 

25절에 보면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간과”라는 말은 “용서”라는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너는 지금부터 의인이다.”라는 말씀 한마디면, 하나님의 의를 세우실 수 있으신데 “왜 구태여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셨을까”하는 것입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곧 이때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인간의 죄를 간과하시는 모든 때를 일컫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때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실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 대한 의롭다 하심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공정한 재판을 통해,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사형시키셨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의가 참된 의로 세워지고, 유지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의인다운 의인으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 깊은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랑하는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더 사랑하고, 육체를 더 사랑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진리를 더 사랑하고, 영원한 생명을 더 사랑하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호흡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저수지에서부터 우리 집 욕실 수도꼭지까지 파이프에 물이 차 있는데, 수도꼭지를 틀지 않으면 물이 쏟아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집 안의 전선에도 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전등의 불빛도, 텔레비전의 영상도 절대 나타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얼마나 우리 자신을 드리고 응답하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계3:20절을 읽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문을 여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들어가 거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충만하게 다가와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사랑과 실체를 확인할 수 있고, 기도하며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호흡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심령에 주님의 사랑은 충만합니다.

따라서 우리 할 일은, 내가 내 영혼의 스위치를 켜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면, 당신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삼기까지 사랑하사 “우리를 의롭다”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조주 아버지의 능력과 생명을 날마다 우리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힘은, 오직 이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