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절(부활주일) 설교 원고 - 아름다운 동행 (누가복음 24:13-17)

Johnangel 2016. 3. 13. 00:13

부활절(부활주일) 설교 원고 - 아름다운 동행 (누가복음 24:13-17)


베트남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69년 미국인들은 다른 어떤 해보다도 추운 겨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어느 날 미국 중서부 인디아나 주에서 살던 빌과 글로리아 부부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결혼하여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 다 음악을 사랑하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교회 음악사역에 헌신하고자 학교를 사임하고, 미래의 사역을 설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너무 어두웠던 탓인지 작곡도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사역의 길도 열리지 않은 채 1970년 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빌과 글로리아가 빌의 아버지를 모시고, 자기 사무실 앞에 도착하여 주차하다가 주차장 한 구석에 으깨진 아스팔트를 헤치고 고개를 내밀고 있는 파란 풀잎들을 보고 아버지가 “저 풀잎들을 보라”고 소리칩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봄이 오는군요”라고 대답합니다.

얼마 안 되어 이 가정에 아들이 태어납니다.

이런 어두운 시대를 자기 가족이 “어떻게 헤쳐 가며 살 것인가?”를 기도하던 글로리아의 마음속에 한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님의 임재의 기쁨이 그녀의 마음을 채우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녀는 붓을 들어 노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이 유명한 찬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금년에 우리는 또다시 부활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 가운데 성도임을 고백하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오늘을 살고 계신 분은 없는지요?

빌과 글로리아에게 함께 하셨던 살아계신 주님의 임재가 왜 우리에게는 그렇게 경험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실 성경에 보면, 주님이 당신의 제자들을 선택하신 순간부터 그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심”은 그분의 약속이었고, 습관이었습니다.

막3:14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택하심의 목적이 “함께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지상생애 마지막 약속은 무엇이었습니까?

마28: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왜 그분의 함께 하심이 경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안식의 여백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은 엠마오 길을 가던 예수님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화두인 13절은 “그 날에”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날이 언제입니까?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지금의 주일입니다.

본래 유대인의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 후 첫 날은, 주일 혹은 일요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안식일 다음날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고, 그들에게 안식일 준수는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금요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있었겠지만, 그러나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면서 그들은 조용한 침묵 속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왜 계절이 바뀌어 봄이 와도 부활에 대한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을까요?

저는 그 원인이 우리가 일에 중독되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죽어라고 일하다가 죽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중독을 심각한 병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중독은 자신이 빠져 있는 일 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인생의 모든 기쁨과 의미를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직장을 떠나서 집에 와서도 근무시간이 아닌 주말에도 일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신다면, 그리고 일 외에는 인생에 아무런 보람과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살고 계신다면 일중독을 의심해 보셔야 합니다.

안식은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관점을 제공하고, 인생의 경이를 받아 드리게 하는 복된 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여기 제자들에게는 이런 안식의 여백이 있었고,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을 받아드릴 마음의 준비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가 쓴 “부활”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도 안식일 준수는 금요일의 사건들이나 제자들의 처참한 기분을 보다 넓은 안목으로 바라보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다음날 아침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는 하나님을 향한 감각이 마음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너머 존재하는 신비로움에 경이감으로 응답하는 능력, 이해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는 것에 놀랄 줄 아는 능력이 준비되었던 것이다”

창세기 1장이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사역을 진행하시면서도 한 단계의 창조가 끝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안식의 미학을 즐기시고 있는 주님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엿새의 창조가 끝난 후에는, 하루를 온전히 쉬시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준비하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런 안식의 여백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부활처럼 놀라운 진리 앞에 감격과 감동 없이 살아갑니까?

그 이유는 바로 우리 마음에 부활의 사건에 놀랄 수 있는 여유, 그 자체를 상실한 까닭입니다.

개혁자 말틴 루터는, 아름다운 부활절 이른 아침 집의 창문을 열고 물기 머금고 생명의 기지개를 펴는 꽃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 순간 소리를 치며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그렇다. 부활의 주님은 저 소생하는 아름다운 잎사귀마다 부활의 진리를 새겨 놓으셨다”

따라서 우리가 부활의 감격을 원하신다면, 부활을 부활로 느낄 수 있는 안식의 여백이 우리의 내면에서 먼저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믿음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 이후에 예수님께 대한 모든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던 좌절한 슬픈 가슴의 제자들이었습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렇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슬퍼하고 있었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아직 저버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예수님을 비판하고, 예수님에 대하여 계속 이야기하는 불신자들은 희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비판조차도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전도하기가 제일 어려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예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끄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전도 대상자가 예수님을 비판하고, 교회를 비판하거든 기뻐하십시오.

그들은 포기할 수 없는 자기들의 관심을,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어떤 일이 생깁니까?

한순간 그들이 나누던 대화속의 성경 이야기가 그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마음속이 말씀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32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가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했을 때, 그의 선배는 요한 웨슬러에게 “말씀이 믿어질 때까지 말씀을 붙들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어느 날 올더스게이트 스트리트의 작은 교회에서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십자가의 죽으심의 사건을 믿지 못하고 목사가 되었던 “윌리암 쿠퍼”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어느 고난주간을 앞둔 토요일 오후 교회 목양실에서 주일날 사용하게 될 주보에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라는 설교제목 그 아래 설교자 “윌리암 쿠퍼 목사”라고 기록된 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자기 죄가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하셨다”는 것이 깨달아지자, 통곡하며 주님 앞에 엎드려 예수를 자기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믿음의 사람들과 이야기 하시고, 그들에게 물으십시오.

그 대화 속에 어느 날 성령께서 당신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말씀이 당신을 붙잡는 날이 올 것입니다.

말씀은 주님께서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도구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믿음의 대화를 시작하십시오.

믿음의 대화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화 속에 살아계신 주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열고 구하십시오. 찾으십시오. 문을 두드리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실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 되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3. 일상의 경이적인 신비한 체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장소를 예배당으로 국한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부활하신 주님이 자주 당신을 나타내 주시는 장소는 일상생활의 현장일수가 있습니다.

30-31절을 읽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결정적으로 부활하신 주와 함께 하심을 경험한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바로 식탁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식탁에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감격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눈이 열리면 우리의 식탁에 함께 하신 그분이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렌스 형제는 식탁은 “내가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나의 지성소”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식탁에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오, 우리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계신 분이다”라고 오래 전부터 신앙고백으로 이런 고백 문을 장식해 왔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저서에서 “부활 식탁의 회복을 외치며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 가운데 하나가 식사문화”라고 증언합니다.


그렇습니다.

5병2어의 기적의 현장에서 제자들을 만나주시던 주님, 최후의 만찬의 식탁에서 떡과 잔을 들고 제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던 주님, 갈릴리 해변의 식탁에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제자 시몬 베드로를 만나 생선을 건네주시던 주님은 오늘도 식탁에서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따라서 이런 일상의 삶에서 경이적인 신비한 눈이 열린다면, 우리에게 일상의 장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증언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날마다 그분을 만나고, 그분에게 헌신을 드리는 놀라운 부활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기 엠마오 도상의 식탁에서 주님을 만난 두 제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33절에 보면, 그들은 다시 소명의 일터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34절에 보면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과연 살아나셨다!”

이것이 바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경험하는 제자들의 부활의 감격이요,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외치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까?

“주님께서는 과연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