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절 (부활주일) 설교 원고 - 예수 다시 사셨네 (고린도전서 15:1-8)

Johnangel 2016. 3. 13. 00:19

부활절 (부활주일) 설교 원고 - 예수 다시 사셨네 (고린도전서 15:1-8)

                                           

고전15:16-17절에서 사도 바울은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구원과 영생이 헛되고, 우리의 천국도 헛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확실히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왜 무덤 문이 열렸습니까?

무덤이 예수님을 가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고, 비문도 없습니다.

막16:6절에 보면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고 그 비문이 천사의 입으로 낭독되었을 뿐입니다.


왜 이렇게 무덤이 비었을까요?

예수님의 무덤이 빈 사실을 두고, 세 가지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①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 해 갔던지 ②원수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감춰 버렸던지 ③예수님이 살아나셨던지, 이 셋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하고 거짓말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면, 우선 유대와 로마제국의 정부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도적질해 갈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을 막아 놓은 돌의 무게는 약 2톤이나 되고, 로마제국 황제의 이름으로 무덤 문을 인봉을 했기 때문에 그 인봉을 떼는 사람은 사형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무덤 앞에 3일 동안 로마병정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 “내가 3일만에 부활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무덤 문 앞에 파수병을 세워 두었던 것입니다.

혹시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쳤다 할지라도 그 죽은 시체가 어떻게 사도행전을 만들고, 오늘의 부활 종교를 이룩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아니하셨다면 어떻게 오늘까지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으며, 오늘 세계의 교회들이 부활절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원수들이 시체를 감추어 두었다면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셨다”고 세상 사람들이 열광할 때에 “그 무슨 말이냐! 보라 여기 예수님의 시체가 있지 아니하느냐”고 말하면서 기독교를 말살시켜버렸을 것입니다.


행2:41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했을 때, 하루에 삼천 명이 회심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침묵만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 예수님의 시체가 없었기 때문이요, 또한 예수님은 확실히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예수님은 분명히 장사되었습니다.

또한 무덤 문을 돌로 막고, 로마제국 황제의 명령으로 인봉했습니다.

그런데 주일 새벽에 무덤을 막아 놓은 돌이 굴려졌고, 무덤 안에는 세마포로 싼 예수님의 시체는 없고, 세마포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의 시체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3일만에 부활하여 낙심한 제자들이 가있는 갈릴리로 가셨기 때문에, 무덤이 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과연 부활하셨을까? 그 증거는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1. 성경의 사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3-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 “성경대로”라는 뜻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전 700여년전에 기록된 이사야 53장의 “그 말씀대로”란 뜻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고난장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53장에 대하여 신학자 델리취는 “골고다의 십자가 현장”이라고 말했고, 칼빈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력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성경대로”의 죽음이요, 또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도 “성경대로‘입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는 “성경대로”의 종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이 최고의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랑하며, 성경대로 살아가는 믿음이 최고의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고현 믿음의 가족 여러분!

우리는 성경대로 믿읍시다. 성경대로 삽시다. 성경대로 전합시다. 그리고 성경대로 축복을 누리고 삽시다.


2. 예수님의 이적이 부활을 증거합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눅19: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부활하셨을까요?

요14:19절에 보면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적 중에 이적입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통해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체는 벌써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그 송장을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하시고 살려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사로야!”라고 이름을 부르셨습니까?

그냥 “나오라!”고 하면 무덤에 있는 모든 시체들이 다 나오니까 나사로만 나오게 하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우리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무릇 살아서 믿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람아 잔잔하라!”고 명령했더니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소경아 눈을 떠라!”고 말씀하시니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달리다굼!”하시니 죽은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예수님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이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행5:14절을 보면 “이적 때문에 믿고 나오는 수가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적은 복음전파의 유일한 방편이었습니다.

요2:11절에 보면, 가나혼인자치의 이적이 소개되어 나옵니다.

그때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을 보고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죽을 수 있습니까?

백번을 물어도 답은 뻔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에는 절대적으로 부도가 날 수 없습니다.

주경 신학자 메튜 헨리는 “예수님의 이적은 자신의 부활을 증거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적이 무엇입니까?

신학자 쉐리는 “이적은 하나님의 비상 동작”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목격자의 증언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목격자들의 증언 장입니다.

5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게바에게 보여 주시고” 6절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여주셨고” 7절에서는, “야고보와 모든 사도에게 보여주시고” 8절은, 바울이 간증하는 내용인데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고 말했습니다.

여기 “보이셨다”는 말씀은 “전해 들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 주셔서 실재로 그들이 “보았다, 들었다, 만졌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주일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가 실재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것이요, 예수님의 시체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재로 베드로가 보고, 도마가 보고, 야고보가 보고, 사도들이 보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오백여 무리들이 정말로 눈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있는 우리 성도들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본래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믿는 사람들을 포박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곳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라고 전도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라고 이 부활의 소식을 누가 전해야 할까요?

내가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가 사니 너희가 살리라”고 말씀하신 이 복음을 누구에게 전해야 할까요?

목마른 인생들에게, 지옥에 떨어질 인생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언제 전해야 합니까?

살았을 때에 전해야 합니다.

죽어 버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 강단 양쪽에 보면, 행복축제 베너가 세워져 있습니다.

함께 따라합시다.

“기왕해야 할 전도라면 더 잘합시다. 언젠가 해야 할 전도라면 지금 합시다. 누가 해야 할 전도라면 내가 합시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차피 예수의 증인들이요, 목격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다.

나의 부활도 믿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의 부활도 믿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가슴을 펴고 담대히 걸으십시오.

우리에게는 더욱 더 강하고 더욱 더 행복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이것이 우리의 찬송이요, 우리의 기도이며 우리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1874년에 로버트 로울은 찬송가 160장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기리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다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