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건 신앙 (다니엘 3:17-18)
다니엘서는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제목을 붙였는데,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을 반영하듯, 다니엘서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메시지와 열방에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메시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귀족의 아들이었던 다니엘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1차로 예루살렘을 침공한 주전 605년에 정치인질로 바벨론에 끌려가게 됩니다.
이때 귀족출신인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함께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거의 70여 년 동안 이방 땅에서, 두 나라와 여러 이방 왕들을 섬기며, 높은 위치의 관직 생활을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에스겔과 동시대 사람인데, 에스겔서에서 여러 번 다니엘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되, 먼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나서,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면, 그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진실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기에 “우리 인간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지는 않지만, 아주 대단한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처럼, 우리 인간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운하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어서 하늘을 날고, 잠수함을 만들어서 바다 속을 누빕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특별히 우리 인간에게만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람에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여, 응답을 받기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사43: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도리와 사명과, 그 본분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43:21절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찬양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창1:26-28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따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아주 특별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왕의 대리자로서의, 우리 인간에게 영광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 사람 하나하나는 천하 만물보다 귀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천하 만물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서 먹음으로, 범죄하고 타락하게 되었고, 점점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결국에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죄 가운데에 살면,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하나님을 점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들은, 영적으로 무지하게 되어서, 하나님 대신 해를 숭배하고, 별을 섬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고목나무 앞에서 복을 달라고 빕니다.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귀한 존재로 사람으로 지으셨는데, 사람이 만들어 놓고 생명도 없는 우상 앞에 복을 달라고 하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래서 출20:3-6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길 수 있는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만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자원함과 기쁨으로 지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고, 계명을 지키면 은혜를 천대까지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역대 왕들과 백성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다가,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끌려가서, 그 나라에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바벨론에게 극가가 멸망해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워낙 인물이 출중하고, 지혜가 있어서, 바벨론의 방백(장관)으로 발탁되었습니다.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높이가 60규빗(30m, 8층 높이), 너비가 6규빗(3m)이나 되는 커다란 금신상을 만들어놓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악기 소리가 나면 그 신상 앞에 모두 절을 하라.”고 했습니다.
아마 모든 사람은, 그 신상 앞에 절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 신상 앞에 절을 하지 않자, 갈대아 사람들이 왕에게 참소를 했습니다.
14-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그리고 16-18절을 읽겠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가 있습니다.
신앙문제에는 타협이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목숨을 건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을 본 느부갓네살 왕은 분이 가득해서, 풀무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하여, 이 세 사람을 그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불이 얼마나 뜨거웠든지, 그들을 집어넣던 군사들이 타죽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풀무불 속에 세 사람이 들어갔는데, 그 속에 네 사람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 사람은 “신의 아들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오신 것인 줄 믿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관경을 본 느부갓네살 왕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26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명에 따라 이들이 나왔는데 “그들은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고, 타는 냄새조차 없었다.”고, 했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입니다.
28-30절을 읽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놀라운 사실은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이 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목숨을 걸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목숨을 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고, 함께해주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기적이 따라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은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주남선 목사님이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잡혀가 고문을 받았습니다.
일본 경찰의 고문은, 잔인해서 말로하기 힘들었습니다.
엄지손가락 두 개를 노끈으로 한데 묶어 대들보에 매달기도 하고,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콧구멍에 붓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에 나무토막을 끼우고 짓누르고, 손톱사이에 대나무침을 꼽고, 인정사정없이 몽둥이로 두들겨 팼습니다.
고문하던 형사가 “잘 생각해보고 마음을 돌이켜라!”라고 하자, 주 목사님은 “백번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요. 참 신은 하나님뿐이고 다른 신은 있을 수가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시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듭니다.
주 목사님은,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기절하였습니다.
얼마 후 의식을 찾아서 눈을 떠 보니, 추운 겨울에 물로 젖은 시멘트 바닥이 불 땐 온돌방처럼 따뜻하였고, 그의 온몸은 포근한 담요에 싸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고 고백합니다.
후에 주남선 목사님은 이 일을 회상하면서 “그 자리에 우리 주님이 와서 계셨습니다.”라고, 간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주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충성하는 이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을 받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마땅히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신앙을 가져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건 신앙을 갖지 않으면, 이렇게 험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 낼 수가 없습니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도 없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환난이 일어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떤 박해를 받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따라서 목숨을 거는 신앙이 없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바라기는 아무쪼록 목숨을 거는 신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삶속에 넘치는 간증거리를 갖고, 주님을 자랑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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