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할 때 강함 주시는 주님 (고린도후서 12:7-10)
고정관념이란 “일반적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고정관념이, 우리는 성경에서 굉장히 많이 깨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강한 것을 선호하며 “그 강한 것을 통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강한 것도 종종 사용하시지만, 주로 약한 것을 중심으로 사용하십니다.
고전1:26-27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여기 “택하사”라는 말은 “일부러, 고의로”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쩌다가 약한 사람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약한 사람을 택하여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람은, 우리가 인간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소개하는 다윗은,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이기 때문에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덟 번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택함을 받았습니다.
사실적으로 다윗은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부족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 이새도 첫째부터 일곱째까지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소개했지만, 여덟째 다윗은 소개할 생각도 하지 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들어서 쓰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면, 쓰임 받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 이 시간에 다시 일어서는, 힘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나의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유명한 성경주석가인 핸드릭슨은, 사도바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지성의 사람이요, 강철 같은 의지의 사람이요, 온유한 마음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도바울이 기록한 로마서 전반부를 보면 “우리는 완전히 죄인이다, 그래서 소망 없는 존재”라고 말하면서 철저히 우리 자아를 무너뜨리며, 우리에게 “무익한 종이요, 무능한 종이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런 자각이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이라는, 말 자체에는 “한계에 빠져있는 존재”라는, 뜻이 있습니다.
먼저 신체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무리하면, 아프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든, 한번 사귀어 보십시오.
내 입안에, 혀 같이 좋은 사람이 있던가요?
아무리 좋아 보이는 사람도,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독이 있고, 섭섭함이 있고, 그래서 “이것이 인간이구나!”하고,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성의 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배웠다 할지라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약점이 있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얘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능력 있는 종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이런 한계와 약점을, 그대로 인정해야 됩니다.
그래야 변화되고, 그런 모습이 있어야, 우리에게 평안함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고난과 위기를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의 약함을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은,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달라지는 것이지,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 있게 자기 자신의 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약함을 인정해야 할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채워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자신 있게 자기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감인 것입니다.
자신감(自信感)이라는 것을 한자로 보면, 자기를 믿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언급하는 자신감이란,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을, 하나님아버지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어떻습니까?
자꾸만 자신의 약함을, 숨기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약함을 탄로 나면, 더 이상 나올 힘이 없고, 아무 것도 자기를 가려줄 것이 없고, 채워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자기 약점을, 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런 이방인같이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약해도, 아버지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한계와 약점을 인정하는 것부터, 우리는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첫 번째 발걸음입니다.
2.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고후1:8-9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각한 고난이 임하게 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고난이 임하든지, 평탄함이 임하든지, 무조건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대부분 언제 기도합니까?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기도는 게을러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고, 또 다른 어떤 것을 믿는, 교만함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도하는 마음이 제일 좋은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상한 심령이란 “하나님 외에는 채워지지 않는 상하고, 병든 심령”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상한 심령을 가져야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수 있는 자세, 기도할 수 있는 환경,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최고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약함을 싫어합니다.
사실 약함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것은, 그렇게 싫은 그 약점 때문에, 일평생 겸손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시각으로는 싫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 사람을 끝까지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약함이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이니라.”
다시 말해서 “내가 약할 때 나는 강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든 연약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임하게 만드심으로 말미암아, 약하지만 강하게 쓰임 받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 형제자매를 인정하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약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고, 절대로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아무도 필요치 않다, 나는 혼자서도 잘한다.”라고, 생각하며, 남을 무시하고, 남들과 협력하려고 하지 않고, 거만합니다.
그러나 약한 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약함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약함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기 때문에, 약한 자들과 함께 손을 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약한 사람들끼리 하나씩 모여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루는 것이 바로 교회라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어떤 사람들의 모임입니까?
교회는, 모두 다 약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약한 자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질 때에 “얼마나 크나큰 일을 하느냐?”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동역의 기쁨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뿌리를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마16:16절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과, 행14:14-15절의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두 고백의 공통점은 “모두가 다 약함을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만이 최고”라는, 고백 위에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기 위해서, 반드시 이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연약한 사람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능력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능력 있게 사용하는 믿음의 종들이 될 줄로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우리는 모두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주변의 약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는, 저들도 강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약한 사람들과 함께 동역할 수 있는, 협력의 영이, 이 밤에 주님께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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