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비전과 함께 하는 사람 (마가복음 10:35~45)
2000년대가 들어서기 전만해도, 우리 성도들에게 신앙의 가장 위대한 영웅들은, 순교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에 관한 간증이야기는,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당시 성도들의 간증 속에서, 어떤 신앙에 대한 고백을 듣게 되면, 자주 출현했던 단어들이 “나는 이렇게 살아갈 것을 각오합니다.”라는, 단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대부분의 성도들에게서는, 이런 단어와 간증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얼마 앞둔 시점에서,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 자인가?”라는,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 중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 주님의 좌우편에 우리들이 앉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탁을 하자 “라이벌 관계에 있던 다른 제자들과 갈등이 빚어졌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본문 말씀에서, 제자들이 갈등을 넘어서,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의 공동체가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권력을 추구하는 자가 아닌, 섬김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1. 주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45절을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섬김의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 섬김의 절정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십자가에서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 마가의 다락방에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범을 보이심으로써, 섬김의 교훈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제자들의 주인과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발 씻기심을 받으셔야 마땅한 예수님께서, 오히려 친히 제자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시고, 무릎을 꿇고,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요13:14-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우리는 교회의 머리를, 예수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의 지체된 우리는, 마땅히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명령과 본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1996년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Greenleaf)가 쓴 “섬기는 지도자 되기”라는, 책이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오늘날 전 세계 100대 기업의 약 절반이 사원들의 훈련과정에서 “종의 리더십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이런 “섬김의 리더십”을, 가르치셨고, 친히 행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류역사 최초의 완벽한 “섬기는 리더”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주님께서 친히 명령하시고,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4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여기“주관한다.”는, 말을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마구 내리 누른다.”고, 번역했고,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높은 사람들은 권력가지고 백성들을 강제적으로 누른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리더십”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높이고, 남을 지배하는 리더십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리더십”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리더십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에는, 이런 섬김의 리더십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 조선의 국교였던 유교적 리더십이 한국교회에, 그런 권력 지향적 문화를 만들어온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느 모임에서든지, 먼저 “누가 높은가?”를 결정해야, 그 다음의 교제가 성립합니다.
먼저 나이를 따지고, 입사 연한을 따지고, 학교의 선후배를 가립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배후에는, 우리의 숨겨진 “권력의 욕구”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심지어 인체에도 차별을 하여, 변변치 못한 사람들을 가리켜 “발가락의 때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자신의 호칭은,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 호칭은 “인자”라는, 호칭이셨습니다.
이 호칭은, 계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역할, 예수님의 사명을 상징하는, 호칭이셨습니다.
따라서 “인자”라는 호칭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가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나타내고 있는 호칭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과 사명이 중요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고현교회가 변하려면, 속히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섬김의 리더십으로 채질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4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우리는 모두는 고현교회 공동체에서, 주님의 제자로써 주님의 본을 받아 섬기는 자가 됩시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모든 성도들로부터 존경받고, 또한 우리고현교회는 이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행복한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어 갈 것입니다.
3. 고난 후에야 영광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김의 과정에서 “잠시의 고난을 견딜 수만 있다.”면, 주님은 섬기는 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영광”을 약속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섬기기를, 싫어하는 것일까요?
섬김이란, 자신에게 고난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섬김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보편적인 실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섬김의 보상이 빨리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섬기는 과정에서, 고난의 때에 쉽게 좌절하고, 쉽게 원망하고,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은 “하늘나라의 약속된 영광”을, 분명하게 암시합니다.
40절을 읽겠습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보상은, 예수님께서 임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섬김의 결과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가 알아서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7절에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38절에서 너희는 먼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얻기 위해, 주님께서도 먼저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시며,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나라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섬김이란, 땀 흘림이요, 희생이요, 헌신이요, 고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섬겨야 할 이유는, 고난 후에 “하늘나라의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엡1:17-23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앞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주님이 받으셨던, 그 하늘나라의 영광을 여러분들도 기대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코로나19팬데믹의 고난 속에서도, 교회공동체의 부흥을 위해 받은 직분에 충성하며, 목장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각기 주어진 재능으로, 성도들과 서로 위로하고, 교제하며, 섬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력합시다.
사랑하는 우리 고현교회 믿음의 가족 여러분!
세상의 영광은,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영광과 상을 소망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단순히 구원이나 받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짜 구원을 받은 사람이면, 상을 얻는 일을 양보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댓가를 즐거운 마음으로 지불합시다.
주를 위한 고난을 피하지 말고, 주를 섬기기 위해 낮아지는, 생활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힘들다고 포기하지 맙시다.
낙심하지도 맙시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선하신 계획을 갖고 계심을 믿고, 더욱 더 신뢰합시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섬김은, 땀 흘림이요, 희생이요, 헌신이요, 고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섬겨야 할 이유는, 고난 후에 “하늘나라의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지체로서 섬김을 통해, 주님께서 받으신 하늘나라의 영광을 사모하는 가운데, 오늘의 삶이 힘들다할지라도, 인내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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