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교회가 탄생하다 (사도행전 2:1-4)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강림은 “신약교회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셔서, 신약교회가 탄생하여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예루살렘은 요란해졌습니다.
이제 앞으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온 세계가 요란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신약교회가 탄생하기까지, 표현이 좀 낯설기는 하지만, 태중에 있었던 기간은, 얼마동안이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신약교회 탄생이전의 성도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도는, 교회의 잉태기간에 이미 존재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사도들이요, 예수님을 따르며 헌신했던 하나님의 자녀들로써, 수적으로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과연 이들 가운데 계셨을까요?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신 일이 있었나요?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자주자주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성도들은, 어딘지 모르게 불완전했습니다.
사실 당시 제자들을 보면, 지금 우리보다 못한 면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보면 “이것도 못 깨달아! 이 바보 같은 사람들”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신약교회가 잉태기간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1. 신약교회 탄생의 울음소리입니다.
해산할 준비를 하고 있던 신약교회는, 드디어 성령이 임하신 날, 출생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애찬을 나누며, 하나님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제자들, 또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이, 최초의 신약교회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직 세상을 향해서는, 베일에 가려진 교회였습니다.
아직 형체가 드러나지 않아, 마치 만삭이 된 엄마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드디어 세상 앞에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신약교회의 탄생을 알린 날, 즉 “신약교회의 생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교회는, 성자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로 인정되셨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란, 무슨 뜻입니까?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꼭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되신 것일까요?
그리고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메시아가 아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기름 부음 받은 존재이십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눈에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그 보습을 드러낸 시점이, 세례를 받으실 때였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그의 머리에 임하시고, 하늘에서 그에게 기름 붓듯이,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명실 공히 “기름 부음 받은 그리스도”가 되어서, 세상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성령은, 신약교회에도 이와 같은 원리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2. 신약교회 성도들은 한 성령을 마신 자들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왜냐하면 우주만물 피조물의 생명과 예수님의 부활생명, 그리고 신약교회의 생명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태동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예수님의 잉태와, 예수님의 공생애 출발점에, 함께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인 신약교회도, 그 출발은 오순절 성령강림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했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사람이 되고, 동시에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 접붙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세례를 받습니까?
예수 믿을 때입니다.
그리고 언제 예수님의 몸인 교회에, 한 몸으로 연합되었습니까?
예수 믿고, 성령의 세례를 받았을 때입니다.
고전12:13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과 “한 성령을 마셨다.”는 것은, 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믿을 때, 굉장히 드라마틱한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그 사람의 삶에 대격변이 일어나고, 또한 남들도 분명히 알아챌 수 있는, 어떤 강력한 증거가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성령세례가 체험적으로 일어난 경우입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예수 믿고, 교회 안에서 자라난 사람은, 언제 성령세례를 받았습니까?
이런 사람에게, 우리는 “너는 어떤 체험이 없기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를 받을 때, 어떤 체험도 없고, 겉으로 보이는 어떤 표적도 없기 때문에 “너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라고 절대 말할 수 없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체험 이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어떤 느낌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가 주되심의 믿음이, 말씀 위에 굳게 서기 전에, 갑자기 어떤 체험이 임한다면, 우리는 큰 혼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어떤 체험, 즉 “뜨거움이 곧 그 사람의 영적성숙을 의미한다.”는, 주장에는, 절대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과거 교회역사를 보면, 실패한 부흥사들은, 대부분이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특별한 은사 없이, 예수그리스도만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영혼을 보살펴 주는 부흥사들은, 사역자로 장수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주님 손에 붙들려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거의 다 넘어지고 쓰러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은,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은사와 영적인 성숙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말씀대로 고백하면, 그 사람은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이미 교회에 임하셨고, 성령세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이 약속하신 주일 오전 9시에 오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은, 유대나라의 3대 절기 중 하나인데, 이 절기는 유월절 후 7주가 지난 50일 만에 지키는 절기여서, 칠칠절, 혹은 오순절이라고 말합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모인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행1:15절에, 나오는 120명, 꼭 그들만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주경학자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갈립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까지, 약 10일간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 열흘 동안, 120여 명의 사람들이 다락방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늘 기도만 했을까요?
아마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은 “흩어졌다. 모였다. 하면서, 주님이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이 몇 시입니까?
15절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 부분에서 “제3시”라는, 시간이 나옵니다.
제3시면, 우리나라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이 시간을 두고 신학자들은 “어떻게 오전 9시란, 이른 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을까? 그것은 분명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날부터 시작해서, 주일마다 함께 모이던 습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해석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때가 주일아침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과 만나 애찬을 나누며,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씀해 주시던 예배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주일에 성도가 교회에 모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은혜를 사모하여 모인 자들입니다.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손을 들고 서 있었거나, 엎드려 있지 않았고, 앉아 있었습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그렇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볼 때, 기도하는 중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사람들은 기도할 때, 보통 일어나서 손을 들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앉아 있었다.”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아침이든, 저녁이든, 모이기를 힘씁니다.
따라서 우리는 최소한 교회가 정해 놓고, 공식적으로 모이는 시간만은, 꼭 참여해야 합니다.
로이드 존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께서 어느 집회에서 우리에게 전무후무한 은혜를 내려주실지 모른다.”
그렇습니다.
주일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는, 성령의 임재를 맛보았고,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밖에 있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성령 충만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모세시대에 보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그 자리에 성령이 충만하게 부어져, 유대장로들이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장로회에 참석하지 않은, 두 사람이 자기 집에서, 동일하게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예언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는 장소가 달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같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까?
우리는 예배시간 한 시간, 한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언젠가 우리 각자에게 있는, 영육의 질병을 치료해 주실 뿐만 아니라, 내 힘으로는 도무지 어찌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과 같이 모여서 말씀 받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시간에, 그 문제를 분명히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실 때,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모인 제자들은 홀연히, 예기치 못한 시간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엄청난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주님 손에는, 우리에게 부어 주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때마다 허락하시는, 은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이, 어느 집회에 강하게 임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는 찬송, 말씀에 대한 갈급함, 하나님의 복음을 기쁨으로 증거하기, 사랑으로 즐거이 봉사하기,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지 헌신하겠다는, 열정,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충만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이 시간 반드시 저와 여러분에게 기쁨과 새 힘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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