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 만든 사람 (요한복음 4:46-54)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과는 본래 상관이 없었던 한 사람이 보여준 믿음과, 그 믿음으로 인생의 위기를 극복한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가 왕의 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그가 당시 갈릴리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헤롯왕의 고위층 신하였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권력, 재력, 그리고 영향력을 총동원해서,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징후만 더 가까워지고 있는, 절대 절명의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얼마 전에 갈릴리 가나마을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의 주인공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지역에 오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 소식은, 왕의 신하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잎새와 같은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이 희망을 근거로, 그가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위기는 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54절은 이 사건을 “갈릴리로 오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위기를 기적으로 만든, 이 사람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1.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입니다.
47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와 간곡하게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4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냉정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 아버지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오히려 이 아버지로 하여금,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한 도전이요, 자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은, 믿음의 출발로서는 수용될 수 있지만, 결코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이란, 시작으로서는 필요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기적이 이런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혹시 위기에 처해 계십니까?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희망이 필요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분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분에게 매달려 보십시오.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은 유치하지만, 그러나 기적의 시작이기 때문에, 이 왕의 신하처럼, 당신의 위기는 믿음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2.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49절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기대를 알아차리지 못한 왕의 신하는 다시 한 번 예수님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아들이 아파 누운 곳으로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5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들의 병상으로 가서, 그의 이마에 손을 얹으시고, 안수하여 기도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다만 치유의 말씀을 선언하시는 것으로, 반응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을까요?
저는 예수님께서 이런 반응을 통해, 이 왕의 신하의 믿음이 성숙되기를 기대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왕의 신하가 이런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숙함으로 반응하였습니다.
50절을 끝부분을 보면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에게 진정한 기적이란 “눈에 보이는 표적이 있어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지하고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이제는 더 이상 자기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소원이 믿음의 근거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믿음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마24:3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10:17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기복적인 믿음과, 성경적인 믿음의 차이는, 믿음의 근거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믿음의 근거는 아직도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소원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십니까?
이 왕의 신하의 믿음은, 짧은 순간에 놀라운 믿음의 변신을 가져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에서,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결정적인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가 말씀을 붙드는 순간, 이제는 말씀이 그를 붙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가슴속에는, 이미 찬양이 샘솟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아버지는, 기적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 집으로 뛰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현대어 성경은, 51절의 시작을 “서둘러 집으로 가고 있는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그의 인생을, 그의 발걸음을 이렇게 변화시킨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그가 만난 위기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말씀이 그를 붙드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3. 가족을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53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그렇습니다.
빛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살아 계신 주님의 행하신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도,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간증은, 가장 가까이서 간증의 실제를, 목격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영향력의 가장 실제적인 결과가, 가족을 구원한 것입니다.
이 가족들을, 주님께 나오게 한 이 기적의 놀라움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주님의 역사하심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왕의 신하가 간곡하게 요청했던 것처럼 “그의 아들이 누워있는 곳으로 찾아가 기도하시지 않고, 그냥 말씀으로만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때 당시의 상황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에 있었고, 이 왕의 신하의 집은, 갈릴리 북쪽인 가버나움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걸어서 몇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 왕의 신하가 믿고, 자기 집으로 내려가던 중에, 자기 집에서 주인을 만나러 오고 있는, 종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들이 “주인의 아들이 열이 떨어지고 살아났다”고, 보고하자, 주인이 그 시간을 물었을 때, 종들은 “그 때가 어제 7시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선언하시던 때였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가족들이 알았을 때, 그 감격은 어떠했을까요?
우리 인간은,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날 이 가정이 경험한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인간 이상의 분이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오늘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곧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없는 안타까운 순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가족들이 서로가 떨어져 있으면서, 어려운 순간을 지날 때,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가정의 위기가 오히려 이 신하의 가정처럼, 가정을 기도로 묶어주고,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 왕의 신하는, 아들이 죽어가던 이 위기 때문에, 그의이 가정은, 주님께 나올 수 있었고, 주님을 신뢰함으로, 구원받는 가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왕의 신하의 호소를 들으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던 예수님, 그분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이,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수만 있다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우리 가정 안에서, 얼마든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라기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이 힘든 때에,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기도하여, 그 기도 가운데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그 기적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고난을 헤치고 승리하시는,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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