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교회공동체는 다르다 (야고보 5:14~15)
육신이 아프고 병이 들면, 믿음도 약해져서, 혼자서는 도저히 기도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때는, 반드시 돕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장로들을 청하고 영적으로 보살펴 주는 사람들을 불러 함께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육신이 아프고 병이 들었을 때는,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동역자가 필요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가 언급한 “기름을 바르고 아픈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내용은, 지금까지도 신학자들 간에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저의 스승이셨던 주경학자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해석하셨습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말은, 헬라어로 “알레이프 산데스”인데, 이것은 “종교의식”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기름을 발라야 한다.”고, 생각해서, 성지순례를 다녀올 때, 아픈 곳에 바르기 위해, 올리브 기름을, 사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환자가 병원에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약국에서 약을 받아 복용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술을 선물로 주셨고, 또한 그것을 통해, 역사하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약을 사용해야 하느냐?” 아니면 “기도만 해야 하느냐?”를 두고, 필요치 않은 논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극단적인 사람들은 “약에 의지하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질병의 치료를 의사의 손에만 맡겨 두는 것이 아니라, 치료와 함께 중보기도를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고통과 절망가운데서도, 우리를 평안함으로 이끄시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그분의 역사를 기대하게 합니다.
그 이유는, 치료하는 의사나, 우리의 중보기도는, 모두 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께서 중보기도를 하는 자에게나, 치료하는 의사에게나, 동일한 기쁨을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집사님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집사님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며 “집사님을 위해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께서 뜻밖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 보니 좋은 점도 있네요. 우리 목장 식구들이 매주 저를 찾아와서, 찬양하고, 기도하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신 답니다.”
그렇습니다.
목장 식구들은,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목자의 심정으로 아픔과 슬픔을 함께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나라가 임한 사도행전에서, 말씀하신 공동체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의 중보기도는, 공동체를 세우는 열쇠가 됩니다.
기도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고, 능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엘리야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픈 사람,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해서, 함께 중보기도 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함께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가족들이 있다.”는 것과,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며 기도할 때 “치유와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은, 우리를 치유하게 하는 놀라운 주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교회공동체 안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나를 살리고, 내 가정을 살리고, 내가 속한 교회공동체를 살리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따라서 오늘밤 우리의 기도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기를, 갈망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병을 낫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동시에, 또한 병을 낫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도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뜻을,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편지의 끝부분에서,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19-20절을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야고보는 기도로 “서로를 세우며,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의 교회가 된 우리가 “진리를 떠나 미혹”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교회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붙잡아 주고, 세워주는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지 않도록, 서로를 붙들어 주는 교회공동체, 서로를 향한 중보와 사랑이 가득한 교회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야고보가, 뜨거운 가슴으로, 편지의 마지막에 외친 메시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공동체, 연약한 자를 품는 교회공동체, 서로를 감싸고, 위로하고, 보호하는 교회공동체는, 야고보가 그토록 바라던 소망이었습니다.
야고보는, 교회공동체 안의 성도들이, 서로를 붙잡는 손과, 진실한 고백이야말로, 주님이 그 어느 것보다, 기뻐하시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탄 마귀는, 끝임 없이 우리를 진리에서, 미혹하고, 실족하게 하고, 방황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싸움을 함께 싸워 나갈 수 있는 고현교회공동체”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믿음은, 혼자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믿음으로 보듬어 줄 때, 비로소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상12:23절을 읽겠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기도실에 자발적으로 모인 중보기도 자들이, 가정과 예배와 교회, 사역자들과 열방, 병든 자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 시간, 주님께서 친히 고개를 숙여, 귀를 기울이시는 것 같습니다.
그 기도소리에, 우리교회 예배는, 더욱 뜨거워지고, 찬양은 더욱 큰 소리로 울려 퍼집니다.
더 나아가 기도는, 놀라운 하늘의 비밀을 맛보게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지금도 기도실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사연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기도의 그 비밀을 알기 때문에, 기도를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맛본 자만이 알 수 있듯이, 도무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맛이, 바로 “기도의 맛”입니다.
기도로, 우리고현교회공동체를, 더욱 견고히 세우는 성도들이 됩시다.
이것이 우내가 살길이요, 우리 가정이 사는 길이요, 우리고현교회공동체가 우리 지역사회와, 민족과 세계열방에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금년 2022년은 한 해는, 우리 교회에 리더십 체인징을 이루어 가는 아주 중요한 한 해입니다.
이때에 우리 모두는 지속적으로 기도회에 참석합시다.
그리하여 기도의 맛을 경험하시고, 주님의 능력을 통해, 교회공동체와 가정의 모든 범사에 문제들을 해결 받고, 개인의 질병도 치유 받는 은혜를, 경험하고, 체험하는 우리 교회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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