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문을 박차고 들어가다 (사도행전 2:44-47)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단번에 3,000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전무후무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강력한 역사는, 성경 어디에도, 인류 역사 어디에도, 다시 반복되지 않았습니다.
신약교회의 시작이요, 처음이었기에, 노크하듯이 조금씩 똑똑 두드려서, 천국 문을 열지 않고, 하나님께서 굉장히 크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자마자, 엄청만 힘으로 천국 문을 완전히 박차고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두 가지 요소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바로 “말씀”과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라는 설교자가 있었고, 그가 전한 진리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성령은, 독단적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아무런 매개체 없이 갑자기 임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때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성령님이 못하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사탄이 더 잘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말씀도 없고, 말씀을 전하는 증거자 없이도, 어떤 사람에게 신비롭게 임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령은, 증거자의 말씀을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37절에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했고, 40절에 보면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라고 했고, 41절에 보면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뒤에 사도들이 무엇을 가지고, 확증하며 권했습니까?
“여러 말”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즉시 세례를 받았습니다.
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라 말하지 않고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을까요?
성령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살전1:5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고전2:4절에서도 보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은, 사람이 사용하는 어휘이자, 동시에 성령의 도구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말씀과 함께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말씀, 성령 그리고 능력 사이에는, 은혜로운 공식이 성립됩니다.
똑같이 놓고, 대등하게 보아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말씀에 사로잡혔습니까?
그렇다면 누구에게 사로잡힌 것입니까?
바로 성령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히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권능이 있습니다.
증거자가 전하는 말씀의 내용은 “율법”과 “복음”입니다.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죄를 책망하고, 마음에 숨어 있는 어두운 것을, 들추어내는 것이, 율법입니다.
베드로는 설교 가운데 청중을 향해 책망했습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오늘날 예배에서, 설교자가 이런 식으로 “너희가 잘못한 것”이라고 하면서, 설교한다면, 도대체 몇 사람이나 그 자리에 남아있을까요?
따라서 오늘날 현대인들은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나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설교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복해야 할 죄 중에 하나가, 목회자의 죄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라면, 이 문제를 놓고, 굉장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결과를 낳습니다.
마땅히 회개해야 할 것을, 바로 지적하지 못하는 강단은, 이미 힘을 잃어버린 강단입니다.
38절을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것이 복음입니다.
율법에도 능력이 있고, 복음에도 능력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고, 복음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 올리는 능력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하면”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말씀의 문맥만 본다면, 회개와 죄사함 사이에, 무언가 시차가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은, 말의 순서일 뿐 회개하면, 이미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와 죄 사함,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은, 모두 다 동시적인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하면”이라는, 이 말은 “그리고”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세례도 받고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확신도 있지만, 성령의 역사가 메말라버린 경우에는, 2차, 3차로 성령께서, 그를 강하게 붙드는, 은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그와 같은 은혜 속에서, 다시 한 번 깨어난다면, 아마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우리교회가 될 것입니다.
42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에 굳게 서서, 성도 간에 교제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⓵떡을 떼며, ⓶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날마다 기억하고, ⓷감사하며, ⓸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네 가지는, 초대교회의 성령 충만한 성도들에게 나타난,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의 4대 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의 모습을 본받아,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굳게 서 있는지, 항상 성도와 교제하기를 힘쓰는지, 그리고 성도와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떡을 떼며, 주의 십자가를 기념하고 있는지, 자신을 살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한 생활은, 증인의 삶입니다.
입으로 “예수 믿으라.”고, 전하며 돌아다니지 않아도, 이미 삶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교회의 지체인, 우리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면,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자연히 생기고, 우리를 통해 예수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교회가 부흥되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받은 성령 충만의 증거는, 이렇듯 삶의 변화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굳게 서서 순종하는 가운데, 섬김으로 성도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성도와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십자가를 묵상하며, 겸손한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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