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마태복음 15:21~28)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땅을 지나고 있을 때, 귀신에 붙잡혀 몹시 고생하는 딸이 있는, 이 지방 여인 하나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마 이 여인은, 그 동안 백방으로 딸이 나을 수 있는 길을, 힘써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꽃처럼 아름답게 성장해가야 할 어린 딸이, 더럽고, 추한 병에 시달릴 때마다,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면 “귀신이 두려워 떨며 도망가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하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 만날 기회를 기다리던 가운데, 마을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의 행렬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발길이 머무는 그곳에는, 언제나 기적이 일어났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 말씀이 선포되어진다. 성령이 임재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이 절정에 달하여 우리가운데 오신다.”하는, 이것은 우리의 생애에, 결정적인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멀리서 큰 소리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딸아이가 미쳤다.”는, 것이 자랑이 아닐진대,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르짖을 수 있었을까요?
이 여인은 “주님 앞에 내 형편을, 있는 그대로 내어놓으면, 주님이 나를 만나 주신다. 내 무거운 짐, 아픈 모든 것들을 들고, 주님 앞에 가면, 주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기도의 시작이요, 주님을 만나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토록 훌륭한 결단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마땅히 쌍수를 들어, 그 여인을 영접했어야 옳았을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여인에 대한 제자들의 태도는, 너무나 잔인했고, 또한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귀는, 언제나 불쌍한 간구자들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져 있던 귀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의 입술은, 언제나 부르짖는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기 위하여 준비된 입술이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불쌍한 여인에게만은, 유독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상황에 부딪혔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분이 그렇게 소문에 듣던 자비롭다던 그분이란 말인가?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인가?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더란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럴 수가 있는가?”하며, 낙심하고, 원망하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상황만을 놓고 보면, 얼마든지 원망하고, 불평하고, 돌아설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을까요?
이에 대해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이 가진 작은 믿음의 씨가 자라기를 기다리고 계셨다.”고, 해석하였습니다.
혹시 이 시간 하나님의 절대적 도움이 필요한데, 하나님의 침묵에 부딪쳐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선하신 하나님은, 분명히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받은 축복을 잘 관리하는, 믿음의 그릇이 되기를, 주님은 기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은, 결코 무응답의 시간이 아니라, 바로 그것 자체가 내게 커다란 응답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끝없는 허공만 돌아오는 암담한 상황에 부딪힐지라도, 도무지 물러설 줄 모르는 “불퇴의 신앙”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냉담은, 침묵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24절에 보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이 정도에서 많은 사람들은,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첫번째, 장벽에서 부르짖기만 하던 이 여인은, 두 번째, 장벽이 가로막자, 오히려 한걸음 더 다가섰습니다.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주님께 더 다가와 애원했습니다.
제자들의 냉대도, 예수님의 침묵도, 이 여인의 열심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이러한 열심히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7:7절에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구하는 이의 태도는, 얻을 때까지 매달리는 것입니다.
찾는 이의 태도는, 찾을 때까지 열심히 찾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정말 응답받기 원한다면, 문이 열릴 때까지 몸부림을 쳐서라도,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물러서지 않고,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려 절하며,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여인에게만은, 왠지 응답의 문이 점점 더 굳게만 닫혀져 가는 듯 보였습니다.
26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절한 소원에 대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거절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개란, 더러운 동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개와 같다.”는, 이 말은, 이 여인의 인격과 자존심이 송두리 채,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언제나 신앙이란, 순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존심과 소명, 감정과 사명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히10:38-39절을 읽겠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프슨”의 대통령당선 축하장에서, 그의 한 친구는 이런 축사를 했습니다.
“오늘 각하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 힘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청년시절 각하와 나는 우리가 다니고 있던 교회의 십자가 위에 피뢰침을 세우기 위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철탑 위에서 각하는 엎드렸고 나는 각하의 등위로 올라가 작업을 하던 중 내가 들고 있던 납통이 기울어져서 뜨거운 납물이 각하의 손등에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하는 등위에 서 있는 나를 생각하고 꼼짝도 하지 않고 참아주었습니다. 당신의 그 인내와 성실이 오늘 각하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힘이 되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시련의 납통이 쏟아져, 예리하게 가슴의 상처를 파고드는, 아픈 사연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막다른 골목에서,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사면초가에, 부딪힌 분이 계십니까?
매달려도, 매달려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까?
한번, 두번, 열번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들이 있습니까?
그럴수록 포기하지 말고, 주님 앞에 매달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여인의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여기에, 바로 이 여인의 신앙의 절정이 있습니다.
1. 이 고백은 겸손과 자기긍정입니다.
이 여인은 “내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에 올라가기까지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가 되어서라도 주님의 긍휼을 덧입을 수만 있다면, 주님의 부스러기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부끄럽사오니 종의 하나로 삼아 주소서.”라고, 고백하던 돌아온 탕자의 고백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님 앞에서 “나는 개가 아닙니다.”라고, 반박하지 않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나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나이다. 주님이 개라고 말씀하시면 개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경험과 이성과 자존심에 맞지 않아도 “주여 옳소이다.”를 연발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요, 신앙인 것입니다.
2. 돌아설 수 없는 열심입니다.
어떤 난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열심이란 것은, 우리 인생에 엔진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자동차라할지라도, 엔진에 불이 붙지 않으면, 꼼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열심히 없는 사람을 통하여, 역사를 이끌어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에는, 주님이 주신 비전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내 가슴에 주님 한분 모시고, 주님 한분 때문에 만족할 수 있고, 주님 때문에 죽어도 행복하고, 살아도 행복한 그 행복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바로 본문의 가나안 여인에게는, 그런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은,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수많은 장벽에 둘러싸여 있어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이 여인이 주님 앞에, 그 열정을 보여드릴 때에, 주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3. 주님이 베푸시는 부스러기라면 그 부스러기만으로도 넉넉하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야외로 나가 도시락을, 나눠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과자부스러기도 흘리고, 밥풀도 흘리고, 생선토막도, 땅에 흘립니다.
그리고 한참 놀다 와서 보면, 개미란 녀석들이 새까막게 모여들어, 밥풀과 과자부스러기 생선조각들을, 열심히 나르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보잘것없는 생선부스러기지만, 이 개미들에겐 한철 양식이 되고도 남습니다.
이 시간 “부스러기라도 먹겠나이다.”라는, 이 여인의 고백을, 여러분 마음에 새기십시오.
오늘밤 주님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우리교회에 성령의 불이 떨어지고, 주님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안 되는 일이 될 것이며, 주님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팬데믹으로 말미암아, 나라도, 가정도, 개인도, 모두 다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여기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지금 당신 곁을 지나고 계십니다.
그분을 붙드십시오.
그분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우리는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힘들 때, 더욱 더 주님을 찾으시고,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성령의 위로 속에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본문에서 소개하는 가나안 여인처럼, 문제를 해결 받고, 우리의 모든 환경이 새로워진 삶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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