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구약교회에서 신약교회로 (사도행전 3:6~8)

Johnangel 2022. 4. 1. 08:23

구약교회에서 신약교회로 (사도행전 3:6~8)

 

신약교회의 또 다른 특징은합심하는 교회연합하는 교회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자성도들은 한자리에 모여서말씀을 공부하며교제하며떡을 떼며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마음을 합했습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참 매력적인 동역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도들 중에특별히 연합하고합심해서하나님의 일을 했던하나의 표본이요우리의 역할 모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갈릴리에서고기를 잡던 동역자요최후의 만찬을 준비했던 팀이요가야바 법정으로 끌려가시는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디베랴 바다에 가서고기 잡을 때도같이 했던 자들이요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장래 문제를 예언하실 때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주목했던두 사람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처럼기도하기 위해 함께 성전에 올라가는 기도 팀이었고, 4:3절에 기록된 것처럼 감옥에도 같이 들어간 소위 “감옥팀”이요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받을 때함께 재판받은 동역자이기도 합니다.

 

훗날 빌립집사에 의해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되자예루살렘 총회가 그곳에 전권대사를 파송할 때도베드로와 요한은팀을 이루어 함께 했습니다.

가만히 보면날마다 함께 붙어 다녔습니다.

 

그렇다면 신약교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신약교회는 차이를 넘어 연합하는 교회입니다.

 

“알렉산더 스델리”라는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고독하고 개인적인 종교가 아니다예수 안에서 가지는 우정서로가 마음을 합하는 것은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맞습니다.

교회가 제대로 되려면형제가 서로 동거하고연합하는 기쁨이 있어야 하고같이 기도하고같이 봉사하고같이 예배하고같이 전도하고함께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렇게 연합하고함께하는 교회에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경건생활을 철저히 하고기도를 많이 하고전도를 많이 한다 할지라도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십중팔구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개인양육과 개인훈련보다그룹양육과 그룹훈련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을 상대해서말씀을 가르치고영적으로 키워 주는 것도상당히 가치 있는 훈련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서로가 연합해서 은혜 받는 맛이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너무 편협하고 메마릅니다.

 

여럿이 한마음으로한 팀이 되어 말씀을 배우고기도하고서로 돕고봉사하고전도하면다른 지체와 비교해 보며겸손해 지고또 서로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누기 때문에그만큼 더 풍성해집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 사이에는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꽤 많았습니다.

 

첫째는성격이 다릅니다.

베드로의 성격은항상 적극적입니다.

베드로는 원래 주님 앞으로부름을 받을 때부터항상 열쇠를 가지고 있는 역할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시작하는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될 때복음의 포문을 연 것도 베드로였습니다.

또한 이적을 베풀 때못 걷게 된 이를 일으키는대변인 노릇을 한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어떻습니까?

나이가 들어서는 부드럽고 온유해져서 요일4:7절에 보면“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했지만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지어 주신 별명이 “우레의 아들”인 것을 보면대충 짐작이 갑니다.

 

성격이 얼마나 괴팍하고 급했던지 사마리아를 지나갈 때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니까 9:54절에 보면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라고예수님께 말할 정도로마음에서 올라오는 것을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성격이 굉장히 날카로웠습니다.

따라서 주도적인 베드로와괴팍한 요한이 만났습니다.

 

여러분이 둘 사이에조화가 잘 이루어졌겠습니까?

이런 남녀가 부부가 된다면그 가정은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 집안에 접시가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참 희한하게 짝이 잘 맞았습니다.

왜냐하면예수님 안에서 받은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두 사람의 나이 문제입니다.

베드로의 나이는어느 정도였을까요?

아마 예수님의 수제자였음으로나이가 제일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예수님께 사랑받는 막내둥이였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은나이 차이가 상당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이 차이가 큰 베드로와 요한이 조화를 이루었다”는것은무엇을 의미합니까?

“은혜 받은 교회 안에서는세대차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것입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을 향해젊은이들이 우리를 이해 못하는 “구식”이라고단정지어버리며대화를 기피하는 현상이오늘날 교회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요한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새파란 젊은이가 어른 말을 듣지 않는다.”고큰 소리로 꾸짖는 어른들처럼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이 어린 사람과 한 팀이 되었습니다.

서로 보완하는작업을 했습니다.

 

셋째는신앙적인 성향이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벧전5:8절에서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했습니다.

베드로는아주 전투적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일4:7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말합니다.

 

두 서신서를 비교할 때베드로 전후서는 도전적이요요한 일,,삼서는사색적입니다.

 

베드로전후서는실제적인 말씀이요요일,,삼서는신학적이고조용하고묵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두 사람은 신앙적인 성향에서도차이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흔히 “신앙성향이 맞지 않는다.”고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저분은 날마다 기도도 저렇게 조그맣게 할까소리 좀 크게 하지” 혹은 “저 여자는 날마다 새벽기도에 나와서 왜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그럴까좀 조용히 기도하지”하고비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의 기질이 그렇고받은 은혜가 그런데어떻게 합니까?

물론 너무 떠드는 사람에겐다른 사람을 위해 주의는줄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어떤 일을 놓고 토의할 때도 보면다양한 모습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적극적으로 “믿음으로 합시다됩니다망하든지 죽든지 괜찮습니다그저 믿음으로 밀고 나갑시다.”하는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합시다좀 더 기도해 보고 하지요.”라고신중론을 내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 다르지만모두 받은 은혜대로이야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목사가 “성격이 급해서 앉았다섰다앉았다섰다.”한다면반드시 그 교회에는 “앉았다 섰다.”하는기질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이 생깁니다.

 

사모가 그렇게 할 수도 있고부교역자 중 한 분이 그 역할을 할 수도 있고아니면 장로님 중 한 분이 그런 역할을 해서목사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애쓸 것입니다.

 

교회에는 이렇게 베드로와 같은 사람요한과 같은 사람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바로 되려면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골고루 만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개성이나 신앙기질그리고 받은 은혜를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잘 유지하되공동체에 덕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내가 받지 못한 은혜는누구한테 받을 수 있습니까?

내 옆에 있는형제와 자매를 통해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2. 신약교회는 성령의 지시를 포착하는 교회입니다.

 

신약교회는믿음으로 도전하는 교회였습니다.

걷지 못하는 자를 보고도피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도는평소 일주일에몇 번씩 성전을 드나들었을 것입니다.

걷지 못하는 자는역시 수 년 전부터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이그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걷지 못하는 자를 놓고무모한 모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기회를 만들어 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도록 밀어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잘 포착해야 하며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덤볐다가나중에는 본인도 힘들어 지치고다른 사람도 지치게 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겸손했습니다.

드디어 성령이 인도하셨습니다.

기회를 주셨습니다.

 

여러 날 다녀도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그가 그날따라 유달리 눈에 들어왔습니다.

유달리 그의 내민 손이 보였습니다.

마음이 끌렸습니다.

“이 형제를 도와겠다”고 하는강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지나가면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아서그 자리에 머물러 섰습니다.

그리고 똑 바로 쳐다보았습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렇습니다.

성령이 그 배후에서 일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문제를 바로 다루며항상 능력 있게 일하려면성령의 지시를 잘 포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성령은 어떻게 기회를 만들어 주시며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십니까?

 

첫째는뜻밖의 어떤 일에특별한 관심을 갖도록 이끄십니다.

또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우리를 몰아가십니다.

그리고 내면에강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이럴 때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 음성에 순종할 때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그를 일으키기 위해사전계획을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그 사람 가만히 두어서 되겠니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한번 해보자.” 이렇게 미리 계획을 짜고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걷지 못하는 자를한번 고쳐보자고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요무작정 달려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유집회를 유난히 강조한다든지병 고치는 은사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그다지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사도행전 안에신유집회라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방언집회도 없습니다.

은혜로운 집회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성령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베드로가 성령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누구 이야기만 합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이야기합니다.

성령에 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방언을 받았느냐성령의 역사가 어땠느냐하는 말은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뒤에서일한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뒤에서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성령의 역사를 가지고쇼를 하듯 인도하는 집회라든지성령만 강조하는 집회는잘못된 집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걷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교회로 향할 때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된 교회능력을 가진 교회항상 깨어 있는 교회가 되기를주님은 오늘도 소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기도합시다.

서로 마음을 합해하나가 됩시다.

그리고 문제에 맞서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도전합시다.

그리하면 초대교회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아름다운 역사가 우리고현교회에서도 계속되리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