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영성을 회복하라 (로마서 1:16~17)
우리는 모두는 함께 이루어야할 목표가 있고, 함께 가야할 하나님나라가 있는 가족입니다.
그렇다면 가족이 무엇입니까?
상호책임지고, 상호의존 하는 것이 진정한 가족입니다.
기러기는 그룹을 지어 날아가다가 한 마리가 떨어지면, 다른 두 마리가 함께 죽을 때까지, 아니면 떨어진 기러기가 원기를 회복하여 다시 날아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무리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나는 정말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사람들과 정말 진정한 가족인가?”를, 질문해 보아야합니다.
교회의 예배에 수만 명이 모인다할지라도, 군중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면, 지체하지 않고 교회를 떠나가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떡을 먹은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떠났을 때 “너희도 나를 떠나가려느냐?”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생명의 떡이 여기계시온데 우리가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대그룹에서 변화되지 않고, 소그룹 모임에서 가족이 될 때,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공생애기간 동안 수천수만의 군중 속에서도, 12명의 제자들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에게는 가족이 된 “12명의 제자들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확실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교회 역시 예수님의 비전으로 소그룹 안에서, 제자훈련과 목장모임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비전을 배우고 깨달아서, 주님과 하나 된 가족으로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아비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때, 말씀과 격려와 위로로 영성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부부를 “일심동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혼하여 잠자리를 같이한다.”고 해서, 일심동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일심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엄청난 헌신과 노력으로 인내하며, 부모로부터 통치적인 독립과 경제적인 독립을 이루어야합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부부라고 할지라도 그 사랑은 거품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일심동체는 만들어지는 작품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일생의 희.노.애.락에는 격려와 용서와 위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족을 주신 것입니다.
가정은 늘 좋은 것만을 나누는 곳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고통과 아픔을 나누고, 위로 받고, 격려 받고, 회복을 얻는 곳이 가정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유일한 희망은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교회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그렇다면 신랑되신 주님이 우리고현교회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그리고 신랑이신 주님께서 신부된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요?
내 신부만이 내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내 아이를 양육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신랑이신 주님의 아이를 잘 낳고 있는지, 그리고 낳은 아기를 잘 양육하며, 잘 기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만약 진심으로 나를 알아주고, 나를 격려해 주고, 내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나를 떠나지 않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나를 세워주는 그런 곳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런 곳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곳으로 모여 들 것입니다.
물론 교회나 단체에 조직과 형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조직이나 형식이 이끌어 가면, 우리고현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조직이 잘되어 있는 교회라 할지라도, 교회의 생명은 강력한 주님의 임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사람을 보지 말고, 나를 부르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면, 예배가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마음이 컬컬하고, 공허하고, 영적인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교회생활에 감격이 없고, 교제 가운데 서로 피상적인 이야기만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까?
예배에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다 영적인 존재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찬양 가운데 임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 가운데 임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 가운데 임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임재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시간 이곳에 주님은 임재하여 계신 줄 믿습니다.
나의 모든 문제는 임재하신 주님을 체험하면 해결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그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저주를 친히 담당하시고, 갈3:13-14절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느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내가 복을 받고, 가정이 복을 받고, 가문이 복을 받고, 민족이 복을 받고, 열방이 복을 받아 누리게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걸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롬1:16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우리의 이 땅의 신앙생활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영적인 싸움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기도응답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기도응답입니다.
내가 들고 있는 성경이 진리라는, 증거가 무엇인가?
기도응답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데도 “왜 나에게 그런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아비의 마음으로 전도하기 위해, 교회 밖으로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가정으로, 주택으로, 아파트로, 직장으로, 학교로)
전도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전도는 습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21일 동안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 “무의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복 지속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인생에 무슨 일이든지 한 두 번하고 성공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첫돌을 지나고, 일어서서 걷기까지 15,000번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세상의 변화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람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전도대상자와 좋은 관계를 같고, 지속 반복하여 전도합시다.
한두 번 해보고 안 된다고 말하지 맙시다.
우리 스스로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얼마나 어렵게 예수를 믿었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었는가?”를, 생각하고, 전도를 포기하지 맙시다.
영혼구원은 가장 어려운 영적인 기술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낚는 기술은, 사탄의 강력한 세력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명을 붙든다면, 주님은 나에게 불타는 비전을 주시고, 성령의 능력을 주십니다.
내가 하늘나라의 면류관을 소망하면, 주님은 나에게 사역의 현장을 주십니다.
내가 성령을 인정하고, 내 안에 모셔드리고, 주님과 나는 하나라고 고백하면, 성령님은 나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어진 권위요, 다른 하나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통해 위로부터 획득된 권위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의 12명의 제자 자운데 수제자였지만, 획득된 권위가 없었을 때, 그는 여전히 연약한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성령충만의 획득된 권위로 말씀을 전하자, 삼천 명의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도 이 획득된 권위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봉사나 헌신이나 전도사역에서, 이 획득된 권위로 사역을 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이곳에 임재하신 성령의 강력한 기름부으심을 기대하며, 우리 모두 전심으로 기도합시다.
내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의 강력한 기름부으심을 갈망합시다.
이 시간 기도하는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로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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