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기쁨 (빌립보서 1:12~21)
빌립보서는, 기쁨을 주제로 한 사도바울의 서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가?”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까?
첫째는, 변덕스러운 우리의 환경입니다.
12절에 “나의 당한 일”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입니다.
17절에서 “그들”이라고, 표현된 사람들 때문입니다.
셋째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고 하는 실존의 문제인데, 본문에서 “죽음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느 날 문득 기쁨을 빼앗기고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이 셋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환경의 위기와, 꼬인 인간관계,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기쁨을 빼앗기기는커녕 “도리어 풍성한 삶과 넘치는 기쁨을 누렸다.”고, 오늘 본문에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가리켜 성경학자들은 “기쁨의 서신”이라고 말합니다.
4장으로 구성된 짧은 성경이지만, 그 가운데 “기쁨”이란, 단어가 무려 19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그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주변 환경이 평탄하고, 모든 사람이 그를 도와주고, 인정해주기 때문에, 질병도 없고, 고난도 없고, 육신이 건강해서, 오는 기쁨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무한한 생의 역경과 시련, 그리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핍박과,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위험,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도리어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감옥에 갇혀,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바울은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참된 기쁨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본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는 어떤 모습입니까?
12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나의 당한 일”이란,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히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힘 있게 전하기 위해서, 자유의 몸이 되기를 원했지만, 환경은 그를 로마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포자기를 하거나, 절망이나, 불평이나,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달려왔는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나의 모든 것은 끝났다, 전도고 뭐고, 이제 그만 두자.”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감옥이나 풍랑이 나의 믿음을 흔들어 놓지 못할 것이다. 환경이 나의 생의 목적을 뒤집어 놓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그 생의 목적만큼 고상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의 목적이 고상한 사람은, 그만큼 인격이 고상한 사람입니다.
생의 목적이 저급한 사람은, 그만큼 인격이 저급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환경을 뛰어넘기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생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생의 목적은, 복음전파였습니다.
모든 환경과 사건을 평가하는, 그의 기준이 복음전파였습니다.
그것이 고난이든, 평안이든, 복음전파에 유익이 되면, 성공이요, 복음전파에 해를 가져오면 실패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 내가 고생을 하느냐 대접을 받느냐? 출세를 하느냐 못하느냐?”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어 보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출세와 성공과 안일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롬8:28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확실히 믿습니까?
사실 주님의 부르심 안에서 성도된 우리에게는, 그 어떤 환경도 우연히 전개된 것은 없습니다.
재수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경륜과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병도, 실패도, 불행도, 심지어 돌발적인 사고도, 절망적인 환경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과 지혜와 사랑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일본의 소설가 “오이겐자부로”라고, 하는 사람이 몇 해 전에 노벨 문학상을 받고, 수상하고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일찍이 문학계의 명성을 얻었고, 문학 평론가로 혹은 작가로서 명성을 떨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삶에 큰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내 아이가 정박아로 태어난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에게 이런 아이가 태어났을까? 이것 때문에 우리 부부는 괴로워하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고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아이가 나의 문학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었습니다. 나는 이 아이를 통하여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고, 그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 아이를 통해서 새로운 소설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정박아 히로키 나의 자녀는 나의 문학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내 글 속에 생명이 살아 꿈틀거리는 그 힘은 바로 내 아이 히로키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남들이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그 환경 속에서, 실패라고 생각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발견하고, 인생이 새로워지고, 불행과 실패의 환경을 뒤집는, 역전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2. 우리를 위협하는 두 번째 요인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인간관계가 잘못되었을 때, 큰 이유 없이 나를 비난하는 사람 앞에서나, 부부간의 갈등이 생기거나, 부모 자식 간의 신뢰가 깨어질 때에,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을 때에, 오는 낙심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환경의 위기보다 더 한층 어렵고 복잡한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인간관계의 위기는,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를 고독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이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17절에서는 “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바울을 따르고 돕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바울을 이해하지 못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복음을 전하는 동지들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없는 사이에, 자기들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바울을 괴롭힐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8절에서,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은 “모든 하나님의 일이 나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이 자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절대로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내 방법과 아집 나의 편협한 생각을 버리고 나면, 이 사람이 하는 것도 마음에 들고, 저 사람이 하는 것도 좋아 보이는 법입니다.
내가 잘한 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부족과 실수와 허물까지도 은혜가 될 때, 진정 교회의 일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도바울의 넓은 가슴을 배워 갑시다.
그는 원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까지 기뻐했습니다.
“나는 감옥에 갇혔고 나는 고생을 했지만, 도리어 그들이 일하게 되었으니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복음전도가 “순수한 동기는 아니었지만,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었으니 기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크게 두 가지 가치관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가치관과, 긍정적인 가치관입니다.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해도 긍정적으로 보면서, 행복을 찾습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모든 상황을 어둡게 보고, 스스로 불행하게 됩니다.
원수도 칭찬을 많이 하면, 친구로 변합니다.
나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낼 때는, 밝은 얼굴로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위선이 아닙니다.
걱정이 많아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화평한 모습, 즐거운 모습, 행복한 모습을 해야 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세워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비판자를 품어 친구로 만들고, 원수로 인하여, 내 행복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3.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세 번째 요인은 인간의 유한성입니다.
많은 돈을 가졌으나, 그것은 영원하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높은 권세의 자리에 올랐으나, 내려올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하는, 불안감입니다.
지금은 건강하나 병들 수 있다는, 불안감입니다.
지금은 젊었으나 반드시 늙는다는, 불안감입니다.
결국 그것은 모두 다 죽음의 위기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에게는, 이 죽음의 위기가 없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었으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 죽음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고 살았습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죽지 않으려고 벌벌 떠는 모습처럼, 초라한 것은 없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종종 임종을 지켜드려야 할 때가 있는데, “목사님, 저는 준비가 다 되어있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존귀한 분이십니다. 천국에서 만납시다.”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승리의 모습입니까?
우리 예수님은, 죽음을 뒤집어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이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유명한 성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는 꿈속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어거스틴에게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원합니다.”
환경이 여러분들의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까?
사람 중에 그 누가 여러분의 행복을 빼앗아가고 있습니까?
죽음이 여러분의 기쁨을 위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는, 그 모든 것들을 뒤집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코로나 사태로 인한 고난과 실패한 그 자리에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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