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따라 담대히 전하다 (사도행전 4:11~26)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을 만나,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걷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성전에 있던 사람들은, 걷지 못하는 자에게 일어난 이적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의 곁으로 일제히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고침 받은 자는, 베드로와 요한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호기심과 더불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가운데,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열린 마음을 본 베드로와 요한은, 그 순간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힘 있게 선포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설교하는 베드로를 보고는, 몹시 비위가 뒤틀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질투도 있었고, 교리적인 반발도 있었으며, 사도들을 향한 멸시도 있었습니다.
“성전 맡은 자”란, 요즘말로 하면, 치안본부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당시 성전에 항상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이기 때문에, 성전의 치안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했었고, 그 아래로 “파수꾼”이라 부르는, 군졸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은 사도들을 싫어했고, 급기야 사도들을 감금했습니다.
1. 성령이 주시는 내면의 음성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전할 절호의 기회를, 언제 주실지 예측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그 계획을 전혀 알지 못한 채, 평소처럼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복음전할 기회를 미리 준비해 놓으셨고, 또 들을 자들을 함께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여,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언제라도, 성령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성령이 말하라.”고 할 때, 언제든지 입을 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마음속으로는 “야, 이럴 때 전도 좀 해야겠다.”하는 울림이 있는데, 용기가 없어서 순종하지 못하고, 그 기회를 잡지 못해 영혼을 놓치는 일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기도하러 교회에 가는 길에, 어떤 사람과 마주쳤는데, 이상하게 그 사람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이상하게 무언가 호기심을 가지고, 나와 대화하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는 마음속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이 시간 기도하러 들어가야 합니까? 아니면 이 영혼을 위해 시간을 내어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아마 각각의 사정은 다르겠지만 “성령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라고, 자주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시간에는,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증거 할 때는, 누구나 부들부들 떨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럴 때,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떻게 우리가 기회를 포착할 수 있게 하실까요?
성령님이 주시는 내면의 음성이 있습니다.
이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세상살이에 관한 것은,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았다. 안 받았다.”는, 말은 잘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꼭 전해야 한다.”는, 성령의 간절한 요구 앞에서는 “내가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확신을 얻었다.”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 순종하고자 하면, 그 음성은 항상 우리 마음에 들립니다.
그리고 입을 열 때, 성령께서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2. “말하지 말라”는 위협입니다.
두 사도가 복음을 증거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은 “싫어했다.”고, 했습니다.
행4: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고”
여러분, 그들이 싫어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라고 하는, 신분입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입니까?
아니면 걷지 못하는 자가 일어난 이적입니까?
모두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말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예수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17-19절을 읽겠습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교회를 세우지 말라. 사도직을 내버리라.”고, 위협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감옥에 갇힌 이유는, 전부 “말”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행 때문에, 핍박받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말로 전도할 필요가 없다. 깨끗하고 모범적인 삶을 통해 자동적으로 전도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거짓말입니다.
성경 어느 곳을 보아도, 선행이 복음이라고, 가르치는 곳은, 없습니다.
전도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전도가 쑥스럽다고 피하는 사람들, 전도지를 들고 다니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 믿으라고 전하는 사람을 보면, 은근히 멸시하는 현대기독교인들, 그들은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일리는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말이 있을 때, 행동이 중요한 것이지, 말 없는 행동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입에서 나올 때, 행동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선한생활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지만, 입이 닫히고 벙어리가 된 후에, 선한 행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예수” “십자가” “부활”이라는 말이 비록 서툴고, 어떤 면에서는 논리적이지 않아보여도, 그 말이 얼마나 강력한지 핍박을 불러일으키거나, 아니면 5,000명을 구원하거나, 둘 중에 하나로 나타납니다.
왜 이와 같이 두 가지 양극단의 현상이 일어는 것일까요?
그만큼 복음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 없는 구름처럼, 그저 지나가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듣는 자는, 구원받을 것이요, 5,000명이 아니라 5만 명이라도,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증거를 하면, 듣기를 거부하는 자는 이를 갈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그 말에 대항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요, 능력의 말씀이요, 성령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세상이 싫어하니까 입을 다문 채, 복음 증거를 통해 나타나는 이 놀라운 능력을 맛보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세상으로부터 미움도 받고, 어떤 때는 멸시도 받고, 심하면 핍박도 받지만, 한 영혼이라도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는, 능력을 체험하고 싶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침묵해서는, 안 되는 시기입니다.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온 사방으로부터, 욕을 먹는다 할지라도, 할 말은 해야 합니다.
“교회의 어떤 지도자가 실수했다. 어떤 교회가 부패했다. 기독교인의 반 이상이 썩어서 냄새가 난다.”할지라도, 썩지 아니한 나머지 사람들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마지막 때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요나 선지자에게, 당시 “세상 사람들은 다 미쳤다.”고, 말했고, 신약의 세례요한이 말한 복음을, 당시 세상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임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꼭 점잖은 방법으로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소란스럽기도 하고, 또한 그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부지런히 언어를 통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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