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사도들, 공회 앞에 서다 (사도행전 4:1-22)

Johnangel 2022. 4. 11. 05:13

사도들, 공회 앞에 서다 (사도행전 4:1-22)

 

사도행전 4장에는, 제가 하나님 앞에 항상 불만을 갖고 있던 문제를 검토하는데, 큰 도움이 된 말씀이 있습니다.

 

4:5-6절을 읽겠습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요한과 알렉센더와 및 대제사장들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이튿날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그곳은 바로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나라의 최고법정이자, 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당은 주로 사두개인이었고, 야당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 두 파가 모여서, 공회를 구성했습니다.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주요 인물 중,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와, 대제사장의 문중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지금 화려한 귀족 옷을 입고, 아주 거드름을 피우며, 재판석에 앉아서, 자기들 앞에 초라하게 서 있는, 두 사도를 멸시하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 특히 주목을 끄는 사람은, 안나스입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예수그리스도가 재판 받으실 때, 대제사장보다. 먼저 나오는 이름이 안나스입니다.

 

안나스는. 주후 6년 로마제국의 속국인 수리아를 다스리던 구래뇨(퀴리니우스). 유대나라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안나스는. 로마제국의 꼭두각시였습니다.

 

유대나라는. 소위 단일종교국가이므로, 종교지도자가 실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이 10살 무렵, 대제사장이 되어 약 9년간 유대를 통치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물러난 뒤에는, 그의 아들 다섯 명의 아들들이. 차례대로 대제사장을 차지했고, 그것도 모자라 손자와, 사위까지 대사장직을 맡았습니다.

따라서 안나스가문은, 대제사장 문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 6절에 나온 인물들은, 안나스 집안의 사람들입니다.

거의 반세기 이상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제멋대로 악한 짓을 행한 가장악랄한 집안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특히 안나스는 대제사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계속 막후에서 최고실력자로 행세를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어, 제일 먼저 끌려간 곳이 어디였습니까?

가야바 앞이 아니라, 안나스 앞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안나스가 대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막후에서 가장 실력자로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먼저 데리고 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밤새도록 시달린 뒤에야, 현직 대제장인 가야바에게로 끌려가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끌려온 공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의아한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그 모든 사람들이 다 건재하다.”는,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창자가 터져 죽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있어서, 온 가문이 처절하게 멸망당했으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예수님을 그렇게 잔혹하게 죽인 원흉들이,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이 온 세상의 주가 되신 다음에도, 여전히 세도를 부리며, 호의호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까지 세워놓고 재판하면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볼 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해가 갑니까?

 

만약 사도들이 믿음이 작았다면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셨고,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했는데,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건재한가? 예수님 뒤를 따르겠다고 한, 나 같은 사람은 왜 이렇게 핍박을 당하는 위치에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온 우주의 주가 되시고, 왕이 되셨다고 하는 것, 하나님나라가 임했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하는, 모순에 빠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사도들은 전혀 그랬던 흔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대담하고 여유 만만합니까?

 

그러므로 “예수를 죽이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도, 회개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들이 건재했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마음에 두면 좋겠습니다.

 

만약 기독교가 현세적인 종교라면, 성경에는 절대 이런 본문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장 심판하시는,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영광중에 거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건재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순교의 피를 흘리게 하는, 사람들이 장수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제대로 믿고, 믿음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기가 막힌 고난과 역경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곳이요, 이 세상은 안나스나, 가야바가 건재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를 현세주의로 해석하는 것만큼, 악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잘되어야 하고, 예수 믿으면 무조건 고난이 당장 사라져야 하고, 예수 믿으면 절대 핍박을 안 받게 되고, 예수 믿으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현세주의적 사고방식은, 성경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이야기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세상이 싫어하는 종교요, 핍박받는 종교요, 어떤 면에서는, 계속되는 고난으로, 연단 받는 종교이지, 이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어떤 영광을 누리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부분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끝까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면, 우리는 실망할 것이고, 낙망하고, 예수를 욕하고, 돌아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핍박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잘되는 것만이, 정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되는, 복을 받을 수도 있지만, 안 되는 것도 정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치고, 핍박을 받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한 사람도 핍박을 받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이미 시편저자는, 이 사실을 예언했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문제를 놓고, 합심으로 기도할 때, 먼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시편2편을 인용하여 25-2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 때문에, 열방이 분노하고, 모든 족속이 허사를 경영하고, 예수를 무너뜨리기 위해,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짓밟기 위해, 대적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호의호식하기를, 아예 기대하지 않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성공하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대가로, 많은 사람들에게 핍박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이었고,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예루살렘교회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교인들과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무조건 자기 기도대로 응답받기만을 바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수단으로, 기독교를 믿으려고 하는, 현대 교인들에 비해, 초대교회 신자들의 사상이 얼마나 달랐습니까?

 

그들은 온 세계로부터, 빗발치는 모욕을 당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은 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4:8-9절을 읽겠습니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여기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병 고침을 받았다.”하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고,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는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구원받았다.”는 말과 “건강하게 되었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12절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 개의 질문을 비교해 볼 때, 혼란이 하나 생깁니다.

베드로는 “육신의 병을 고침 받은 것을 구원받았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 예수 믿고 병이 나으면, 그 사람은 무조건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에게 병 고침을 받은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구원받았다.”고, 단정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구원은 “이중 구원”으로서, 첫째는, 육신의 병에서 구원받은 것, 둘째는 영혼의 죽음에서 구원받은 것, 이 두 가지를, 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것이 아주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바울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4:8-10절을 읽겠습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바울은 병자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사람은, 복음을 유심히 들었고, 바울은 그에게 “구원을 받은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적 구원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이 육신의 병에서, 구원받기를 선포하자, 그가 일어나 걷게 됩니다.

이것도 “이중 구원”입니다.

영적인 죽음에서 구원받고, 육신의 병에서도, 구원받은 것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건에서는, 병 고침이 먼저이고, 영혼 구원이 다음에 온 것처럼 보이는 반면, 바울의 경우에는, 영혼이 먼저 구원받고, 병 고침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순서야 어찌되었든, 사도들이 걸어간 길에는, 이와 같은 이중 구원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것은 “병 고침과 영혼 구원을 무조건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위험한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병이 나았다든지, 어떤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받았다든지, 혹은 어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를 크게 체험한 사람에게는, 믿음이 자라는 속도가 빠르고,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확신도 강합니다.

이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편으로 예수를 30, 40년 믿어도 미지근한 분들에게는 “이런 경험을 한 번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재와 현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을 뚜렷하게 남에게 증거할 때, 자신이 체험한 증거들이 있다면 훨씬 좋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와 같은 증거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그것을 주신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말을 “단순히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로만 해석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입증할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한 이중적인 구원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