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 내 부활 (마가복음 16:9-11)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성경에서, 때가 되면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선언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예언하신,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구별하여 세운 제자들과 3년간 사역을 하시면서, 세 차례나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 중에 한 예가 막8:31절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이 들어가는 곳마다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정치계, 경제계, 문화계, 교육계가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확실하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구촌 전 인류가 소원하는 구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 없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구원자는, 죽음을 정복하고, 살아나신 분이어야 합니다.
히2:14-15절을 읽겠습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전파하는, 기독교만이 참 진리요, 참된 구원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세 가지를 다짐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을 철저하게 믿어야합니다.
롬5:8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류가 들어야 할 가장 좋은 소식은, 사람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분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그분이 우리와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대항하여, 적대적이었음에도,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비하신 천국에서 우리와 영원히 살아가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오늘 부활주일날 교회에 모여, 하나님 앞에 정성스럽게 예배를 드리는 우리 성도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어가 보면 “교리로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이 시간 마음속에 숨어있는, 의심을 씻어버리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철저하게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죽으셔서, 장사된 지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에, 무덤 앞에서 일어난 사건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소 예수님은 “내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정작 그 말씀을 믿고, 사흘째 되던 날, 아침 일찍 무덤 앞에서, 서성거린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던 사람들, 나중에는 이를 알고서도, 믿으려 하지 않았던 사람들만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주목해야합니다.
만약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도록 하고 싶은 욕심을 가졌더라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함께 모여, 서로 입을 맞춰 기록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부활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기록했어야합니다.
그런데 4복음서를 보면, 저자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말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최소한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에게 납득시키려면, 그 증거에 있어서 모순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그 당시 여자들의 말은, 참말도 거짓말로 취급해버리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맨 처음에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목격한 자들이, 여자들이라고 증거합니다.
따라서 “그런 여자들의 입을 빌려 예수님의 부활이 증거된 사실을 그대로 기록했다.”는 것은, “도무지 사람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한 책인가?”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단지 4복음서 저자들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자기들이 예상 밖에 발견한 사실을,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적어 놓은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해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11절에 보면 “여자들이 가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듣고도 믿지 않았다.”고 했고, 12-13절에서는 “엠마오라는 시골로 걸어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남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제자들 역시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부활에 대해서, 회의적인 분들이 계신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기록한 사람들의 기록을 정직한 마음으로 한번 대해 보시기 바랍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가 있는 방에 나타나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오늘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을 믿도록 설득하려고,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성경저자들이 “자기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빈 무덤에 대한 사건 하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만약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예수를 죽인 자들이 기필코 훔쳐간 자들을 찾아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자들은, 예수님 부활의 사실 앞에 침묵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부활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의 입을 뇌물로 틀어막았지만, 예루살렘도성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예수님의 부활을 외치는, 제자들과 여인들의 소리를, 잠잠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루살렘도성에, 예수의 부활을 외치며, 이 부활을 믿는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그 거짓말을 믿고, 수천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찬양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임을 확실하게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하게 전해야합니다.
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복음이란 “예수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지구촌 모든 인류가 부활할 수 있고,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예수 믿는 자들은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전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본 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자들은, 나중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직접 빈 무덤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지만, 예수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소리치며 외쳤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이르러 전해야 하는 이유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외에는, 이 세상에는 다른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3. 부활하신 주님과 날마다 동행해야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일 먼저 찾은 사람들은 누구인가?”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 은혜스러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로마총독 빌라도나, 그 당시의 실세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자마자, 소망을 잃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던 초라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제일 먼저 찾아가셔서 “왜 우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을 보신 것입니다.
슬퍼하는 여인,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은 여인, 아무 소망이 없어 보이는 여인, 그를 만나신 분이 부활의 주님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음의 두려움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하며, 절망 중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후, 마음속에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 번민하면서, 갈릴리 바다로 도망갔던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를 일으켜주셨고, 그의 쓰라린 기억들을 치료해 주셨으며, 품에 안아주셨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가신 사람들을 보면, 그분이 어떤 사람들과 동행하기를 원하시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조건들은 다양하지만, 인간의 실존밑바닥을 보면, 모두 다 대동소이합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눈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좌절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무서운 시련 앞에, 고통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내 힘으로 일어설 힘이 없어 주저앉을 때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약할 때, 실패했을 때, 낙심하여 주저앉아 있을 때, 찾아와 주시는 분이, 바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부활하신 직후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는 것이 쉬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몸으로 찾아오셨고, 손에는 못자국이 있었고, 옆구리에는 창자국이 있었고, 제자들과 함께 음식도 나누시고, 귀에 들리는 말로 서로 대화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주님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할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해 승천하시면서, 이미 더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지금 당장 우리를 찾아와서 손바닥을 내밀고 “너는 보아라. 내가 예수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한 시간도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오늘도 이 우주만물을 충만하게 채우시는, 만유의 주가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부활이 나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담대하게 “예수 부활은 내 부활”임을 세상에 담대하게 증거 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라는, 이 사실을, 땅끝까지 세상에 담대하게 증거하는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영광스런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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