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교회의 불순물을 제거하다 (사도행전 5:1~11)

Johnangel 2022. 4. 22. 07:09

교회의 불순물을 제거하다 (사도행전 5:1~11)

 

사도행전 2장부터 4장까지는초대교회의 신혼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때의 초대교회를 통해우리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상적”이라는 의미는 “교인 수가 특별히 많다거나 역사와 전통이 빛난다.”는 의미가 아니라“교회 내에 불순물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는 신앙도 순수하고교회구조도 순수하고무엇보다도 그 안에 신실한 성령의 역사가 흘러넘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 중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교회상은 2장부터 4장까지 나타납니다.

그 기간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5장을 거치며예루살렘교회 전체가 시련을 당하는 때까지줄잡아 1년 미만 전도가 아닐까 추측할 뿐입니다.

어쨌든 이 짧은 기간에참 놀라운 정도로 순수한 교회상이 그려집니다.

 

이때의 모습을 순수한 교회의 원형으로결정짓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저는 서슴지 않고 “성령충만”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성령충만은초대교회를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였습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사도행전교회특히 초창기의 그 순수한 초대교회를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4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바로 여기서부터 사도행전교회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령충만하여 모인 무리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이야기하며하나님의 크신 일을 나타내었고예수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온 천하에 증거합니다.

교회는 이렇듯 성령충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초대교회는 계속하여 성령충만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산헤드린공회 앞에 베드로와 요한이 섰을 때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면에서 열세였지만하나님께서 그들을 성령충만하게 하시고담대히 말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무리가 함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도 그랬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핍박했지만담대하게 말씀을 증거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달라고 빌기를 마치자마자그 모인 곳이 진동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무리가 모두 다 성령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충만”이라는 특별한 용어는사도행전 4장에서만 세 번 연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오순절 불의 혀가 머리 위에서 갈라지는그런 신기한 역사를 성령충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상적인 교회가 경험했던 어떤 이적과 극적인 순간은오늘날과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충만”이라는기본적인 입장에서는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성령충만이 무엇인지 규정해보라고 한다면두 가지로 말하고 싶습니다.

“사로잡힘”과 “절대복종”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성령에 사로잡힌 교회를 일컬어 성령충만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성령에 절대복종하는 사람성령에 절대복종하는 교회를 성령충만하다.”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저는 성령충만에 대해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언하는 것과성령충만을 동일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그것이 성령충만의 한 단면일 수는 있지만항상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충만의 증거는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나성령이 지배하는 대로 복종하느냐?” 이 두 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보면우리에게는 두 가지 소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성령의 소욕다른 하나는육신의 소욕입니다.

아무리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이 두 가지 소욕이 그 안에 공존합니다.

따라서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여기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 이 두 가지를 놓고 볼 때 “어느 쪽에 더 집착하고 있느냐?”고자신에 물어보십시오.

 

비록 특별한 체험이 없다고 할지라도성령에 더 끌리고성령의 말이면 무조건 복종하고성령의 뜻이면 무조건 따라가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육신의 소욕이 있지만그것이 자신을 좌지우지하지 않는 사람은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어느 쪽으로 더 기울어집니까?

육체가 원하는 대로 기울어집니까아니면 마음의 욕심대로 자꾸 끌려갑니까?

그러면서 기도하며괴로워하고 회개합니까?

그리고 회개하고 나서 또 다시 끌려갑니까?

그렇다면 그 빈도를 따져봅시다.

만약 육신 쪽으로 더 자주 끌려간다면그 사람을 두고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절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주여주여 소리쳐도 실제생활이 육신이 소욕으로 더 끌려간다면성령충만과는 거리가 한참 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성령충만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육신의 소욕으로 끌려갑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 조용히 생각에 빠질 때그 생각과 의식의 흐름에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순수한 자아만 존재하며어떤 의지도 작용하지 않는 시간에자신의 생각이 어느 쪽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자주 돌아봅시다.

 

어느 쪽입니까?

성령의 사람은순수한 자아만 홀로 있는 시간에무의식의 흐름마저도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성령충만한 사람이요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입니다.

따라서 성령충만한 사람이 모이는 교회가성령충만한 교회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성령충만을 외쳐도교회에 나오는 성도 개개인이 성령충만하지 못하면그 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가 아닙니다.

 

내가 성령충만한 사람인지아닌지 구별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성령충만하냐?”는 질문에 “나는 어떤 체험이 없다거나다른 사람처럼 불을 받은 것도 없다.”는식의 이야기는 이제 하지 맙시다.

우리는 내 안에 속에 무엇이 가득 들어있는지찾아보면 알 것입니다.

 

성령충만은자주 가끔 또는 일생에 한 번하는 특수한 체험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그런 체험이 전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5:18절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은특별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항상 하나님께 찬양하고감사하고순종하고가정과 일터에서 성실하게 사는 삶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는매일 기도와 찬양이 흘러나오고예배드리는 그 자체가 일상생활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을 더 원합니까?

혹시 “특별한 체험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으면 하십시오.

그러나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 성령의 불을 달라고 해서불 받은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아무도 없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특별한 표적과 이적을 구하면거기에는 사탄의 역사가 침입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소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물론 특별한 체험은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필요한 사람에게 주십니다.

교회를 위해 주님께서 어떤 이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시면어떤 식으로든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족하다 하시면그것으로 항상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