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교회의 면모를 갖추다 (사도행전 5:42)

Johnangel 2022. 5. 13. 10:52

교회의 면모를 갖추다 (사도행전 5:42)

 

사도행전 6장 초두에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 졌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루살렘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교회가 어느 정도로 양적성장을 이루었기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었을까요?

사도행전에서 양적인 증가와 관계있는 구절을 검토해 보면,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의 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처음 다락방에 모인 수가 남녀를 합해 120명 정도였지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루에 3,000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숫자는, 남자만 헤아렸던 것이므로, 만약 여자를 합한다면 6,000명에서 7,000명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또 행4:4절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성전에서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이 하루에 남자만 약 5,000명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딸린 식구들까지 포함하면, 어른만 1만 여명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행5:14절에 와서는, 성도들의 숫자를 세는 것을 아예 중단합니다.

다만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던 것입니다.

이 모든 수를 합해보면, 예루살렘교회는 최소 2만 명에서 3만 명으로 성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로 엄청난 양적 증가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교회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진 상태에서 성장했다든지, 교회조직이 제대로 갖추어진 상태에서 성장했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것입니다.

 

또한 역사가 있어서 차근차근 10년, 20년 터를 닦은 뒤 성장했다면, 무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기껏해야 1-2년 정도 밖에 안 된 짧은 역사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조직도 전혀 없었습니다.

사도들과 교인들, 즉 사도와 제자라는 말 외에는, 예루살렘교회의 구성을 이야기할 다른 용어가 전혀 없을 정도로 갖춰지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모두가 다 성령의 은혜에 들떠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에 2-3만 명이 모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교회를 다루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하는 것은,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이미 사도들이 지도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숫자였습니다.

 

아무리 사도들의 권위가 대단하고 능력이 있었다 할지라도 양적으로 보아서는, 이미 한계치를 벗어났다고 말해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당시 양적으로 비대해진 예루살렘교회는, 어떤 형태로 예배를 드렸을까요?

성전교회와 가정교회, 즉 성전모임과 가정모임 두 가지로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2-3만 명의 성도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으로 흩어져 각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정에서 목장예배, 구역예배, 등으로 모이듯이 소그룹 형태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지정된 날에 예루살렘 성전이나 회당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고 다시 흩어졌습니다.

참 재미있는 교회 형태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도 이런 교회 형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가정교회를 지향하는 사람들입니다.

흩어져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모이고, 거기에서 웬만한 일은 다 합니다.

 

그러면서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두 달에 한 번씩 학교 강당이나 체육관을 빌려 집회를 하고는 전부 흩어집니다.

교회건물도 짓지 않고, 교회조직도 만들지 않습니다.

 

사실 교회가 능력이 있어서 예배당도, 조직도 없이 교회를 운영할 수만 있다면 5,000명이 모이든지, 10,000명이 모이든지, 전 인원을 15명 안팎의 그룹으로 가정교회를 만들고, 교회 건축에 쓸 재정을 전부 모아 구제와 선교비로 쓸 수만 있다면 얼마나 굉장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교회가 참 이상적인 교회형태 같아 보지만, 장기적인 교회형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실 초대예루살렘교회는, 기껏해야 2-3년밖에 유지하지 했습니다.

다 흩어졌습니다.

물론 핍박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는 일시적으로는 이상적이고 좋은 것 같지만, 장기화하기는 어려운 형태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교회의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다 가지고 나와서 서로 나눠쓰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10-20년 동안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무리 성령이 충만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단기간 동안 그렇게 해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초대예루살렘교회와 같은 아주 순진하고 때묻지 않은 교회형태를 사모하지만,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형태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복잡한 21세기 사회 속에서 교회가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예루살렘교회는 비대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형태도 참으로 특이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가지고 있던 큰 특징은 “명령이나 조직, 혹은 어떤 강제성을 가지고 교회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각 개인마다 역사하는 내적인 충동으로 움직이는 교회였습니다.

헌금을 하는 것, 자기 재물을 나누어 쓰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모이기에 힘쓰는 것, 가정에서 떡을 떼며 교제하는 것, 등 어느 것 하나 누가 강요하거나 명령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부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비대해진 교회가 무리 없이 은혜롭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교회에는 명령이 많을수록 그만큼 “교회는 영적으로 병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이후의 서신서를 보면, 명령이 자주 나옵니다.

“싸우지 말라. 마음을 같이하고 주를 섬기라. 흔들리지 말라. 기도하라.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등. 계명 같은 명령이 자주자주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성령의 역사가 자꾸 위축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역사가 흐를수록 어딘가 모르게 초대교회의 순수한 면을 잃어버리고, 은혜가 자꾸 떨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서신서에 나오는 교회들을 보면, 얼마나 문제가 많았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는 가장 원초적인 힘은, 성령께서 마음에 소원을 주실 때, 즉시 순종하는 것입니다.

 

갈5:25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그렇습니다.

각 개인이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남이 시키든지 시키지 않든지, 명령하든지 명령하지 않든지, 스스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면 서슴치 않고 하는 것이 교회의 생명이요, 교회의 능력이요, 교회가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희미해질 때, 교회에 인위적인 방법이 가해지고, 어딘지 모르게 삭막한 분위기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작든지 크든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살아있는 교회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항상 성령의 역사가 살아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의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오늘날 초대예루살렘교회와 같이 성장하는 교회로서 갖춰야 할 부분들, 가져야할 형태, 또 보이지 않는 원동력, 이 모든 것이 구비된 우리고현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