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교회의 문제에 성령으로 대처하다 (사도행전 6:1-7)

Johnangel 2022. 5. 19. 11:15

교회의 문제에 성령으로 대처하다 (사도행전 6:1-7)

 

양적으로 비대해진 예루살렘교회에,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교회도 문제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연약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성령이 임하셨고, 불의 혀같이 임하는 성령을 강하게 받은 성도들이었지만, 성도들의 숫자가 늘어나니까, 예루살렘교회 안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지금까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증거 하는 일을 등한히 하고 교회재정을 사용해 구제하고 관리하는데 시간을 다 빼앗겼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의적으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교회가 갑자기 비대해지다보니까, 일이 많아져서 일에 쫓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급한 일을 먼저 하다 보니까, 목회자로서, 교회를 맡은 자로서,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될 부분을, 그만 놓치고 만 것입니다.

사도들도 인간인지라 자기도 모르게, 그들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위치에서 탈선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교회가 경계해야 할 가장 위험하고,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가 비대해지면, 행정이 늘어나고, 관리문제가 따르고, 조직상 목회자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자꾸 늘어갑니다.

그리고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개인적인 요구들이 많아집니다.

 

또 교회가 성장하면서 대외적인 요구들도 커지게 되어, 이것저것 반응하다보면, 목사가 기도와 말씀을 보는 것을 등한히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바쁜데 뭐 할 수 없지.”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계속되다 보면,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는 일이 뜸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에 깊이 빠지던 모습도 온데간데없고, 겨우 설교 준비하는 것만도, 벅찰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가 비대해지면, 여러 가지 위험 요소가 따르는데, 이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별수 없습니다.

1990년대에 우리교회가 한 500여명 가까이 모여 예배드릴 때였습니다.

당시 우리교회는 시내에서 교인 수로 봐서는, 중상위쯤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조금씩 좋은 소문이 나자, 제가 몹시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때 제가 무엇을 느꼈는지 아십니까?

마귀가 제 앞에 와서, 웃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마귀가 웃는 모습이 상상이 갑니까? 매력이 있을 것 같습니까? 없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아주 징그러울 것 같습니까?

마귀의 웃는 모습은, 그야말로 일품입니다.

 

그 미소가 얼마나 매혹적이고, 아름다웠으면, 하와가 그 미소에 빠졌겠습니까?

이렇게 마귀는 와서 기다립니다.

우리성도들은 담임목사인 제가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위해서 늘 기도해 주어야합니다.

 

그리고 담임목사인 제가 걸어야할 정도를 이탈하지 않고, 더욱 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도록 기도해 주어야합니다.

 

담임목사는 교회의 규모가 크든지 작든지, 일이 많든지 적든지, 목회의 정도는, 생명을 걸고 지켜야합니다.

 

그리고 담임목사인 제가 기도중이거나, 설교를 준비하고 있거나, 혹은 선교지에 나가 있을 때는, 섭섭하게 여기기보다는, 정도를 걸어가고 있음에 감사해야합니다.

 

그러지 않고 “새벽에는 뭐하고 이 시간에 기도한다고 저러나?” “목사도 낮에는 일해야지 성경읽는다고 서재실에만 앉아 있나?”라는, 식으로 판단하면, 이것은 마귀의 장단에 춤추는 것입니다.

 

물론 강단을 맡은 목회자가 24시간 성경 붙들고, 기도할 수만 있다면, 교회가 살고 성도들이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할 때, 가장 경계해야할 위험요소는, 목회자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이런 각오를 가지고, 양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때, 손해 보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인간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어울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도 자주 못 만나고, 모임에도 자주 못 나갑니다.

걸려오는 전화조차 못 받기 일쑤여서, 공사를 막론하고 인간관계에 상당히 손해를 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영적으로 생명을 키우는 일,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을 위해서는, 이런 손해를 감수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오라는 모임에 다 나가고, 만나자는 사람 다 만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루에 성경 보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목사가 이러한 손해를 감수하는 이유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리라.”하는, 사도들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비대해지면 일어나는 문제는 파벌이 조성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무슨 파벌이 있었습니까?

유대파와, 헬라파가 있었습니다.

 

2만에서 3만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유대파, 헬라파, 두 파 정도로만 나뉘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정말 다행입니다.

 

유대파는, 유대 땅에 살면서 예수 믿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헬라파는, 유대땅 밖으로 이민을 가서 살거나, 그곳에서 태어난 소위 교포교인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다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했습니다.

 

한 번에 3,000명 또 5,000명이 돌아왔습니다.

그 중에 어떤 헬라파 신자들은 은혜를 받고 좋아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고,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기뻤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교회를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기를 자꾸만 늦추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돈이 떨어졌고, 나중에는 구제를 받아야할 사람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므로 돈 있는 유대파, 성도들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교포교인, 즉 헬라파 교인들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한 믿음을 가지고, 한 성령 안에서, 교회를 이룬 그들이었지만, 그들도 역시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유대파니 할라파니 하는 분파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지방색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서로 서먹서먹해지고 긴장이 쌓였습니다.

 

문제가 없을 때는, 그런 긴장감이 드러나지 않다가 드디어 폭발했습니다.

구제문제가 불씨가 된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 본토박이 과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보조를 받는데, 헬라파 과부들은 제대로 혜택을 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조그마한 것이 불만이 되어, 그 동안 쌓이고 쌓였던 것이, 결국 터져버렸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균등하지 못한 구제가 불씨였지만, 사실은 그 밑바닥에 깔린 지방색과, 분파간의 갈등이 요인이었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이런 문제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도 일종의 사회인데,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완전한 일치”라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완전한 일치를 자꾸 추구한다.”면, 아마 나중에는 낙담이 되어 스스로 주저앉아버리고 말 것입니다.

 

목사가 만약 교회에 절대로 지방색이 없어야한다.”, 가르치고 절대로 의견갈등도 없어야한다.”,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혀 없어야 된다.”고 하는, 그 “이상론”에 마귀가 뛰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 그런저런 문제도 있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내다보며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처럼, 은혜 받은 교회도 이렇게 기가 막힌 파벌이 생겼고, 고린도교회와 같이 방언과 더불어 많은 은사 받은 교회도 같은 문제를 겪었는데, 우리교회 안에는 문제가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사소한 싸움은, 교인들 간에 칼로 물 베기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싸우다가 더욱 더 가까워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갈등하다가 상대를 더 알게 되고, 그래서 더 잘 이해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밉지만, 특별히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도 받습니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 아닙니까?

교회가 비대해지면, 마귀가 약한 부분을 공격하며 시험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약점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항상 시인하고 “그 약점 앞에 주여, 파수꾼을 세워주소서.”라고, 기도하고 깨어있으면, 사탄이 감히 시험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사람이 좋습니까?

그리고 어떤 유형의 사람이 좀 힘듭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님 제가 힘들어 하는 유형의 사람을, 더 사랑하고, 더 포용할 수 있도록 제 마음을 넓혀주세요”하고, 기도해야합니다.

교회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 같이 짐을 지라고 했지, 비난하고, 원망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때는, 이 말을 꼭 기억하십시오.

“마귀가 내 마음에 초인종을 눌렀구나.” 그리고 “마음의 원망을 꼭 풀어야겠다.”싶을 때는, 당사자를 직접 찾아가서,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내어놓고, 동시에 목사나 신앙의 선배를 찾아가서 “사실 이런 문제로 내 맘에 원망이 생기고 마음이 괴로운데 좀 도와주세요.”하고,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과 그 아름다운 자세를 보고, 굳은 마음이 녹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부분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원망과 비판이 있는데, 겉으로는 없는 체하고 자꾸 눌러 놓으니까, 나중에는 그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터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망을 지나치게 키우면, 파벌을 조성하게 되고, 비판의식이 너무 강하면, 화목보다는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교회가 비대해지면,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소수에게 일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가 커져서 성도가 많아지면, 일꾼도 함께 많이 생깁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많아지는데 비해, 일꾼은 그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원래 일하던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는 만큼 일꾼이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일이 특정 소수에게 가중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도 그와 같은 일이 생겼고, 사도들은 여러 가지 일로 정신없이 쫓기다가, 결국 목회의 정도에서, 이탈하고 만 것입니다.

 

평신도제자훈련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꾼을 키워서, 각자의 은사대로 일을, 골고루 나누자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비대해지자, 사도들이 목회의 정도에서 벗어나고, 파벌이 조성되고, 일이 심하게 가중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는, 이러한 문제 앞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저는 사도들의 처방을 볼 때마다 “역시 사도들이구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들은 역시 은혜 받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갈릴리의 그 무식한 어부들이, 언제 이렇게 지혜로워졌는지, 정말 놀랍고, 부러운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사도들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1. 문제를 보고, 그 원인을 남에게서 찾지 않고, 자신들에게서 찾았습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두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사도들은 문제의 원인을 평신도가 아니라, 교회지도자인 자신들에게서 찾았습니다.

모든 교회의 교역자, 장로님들이, 이 자세를 평생 잃지 않고, 실천한다면, 교회는 은혜는 받을 것입니다.

 

2. 자신들의 부족했던 점을 공적으로 솔직히 시인했습니다.

 

그들의 솔직한 고백 앞에 도리어, 온 교회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공적으로 시인하고, 성도들에게 문제의 원인을 인식시켰습니다.

 

3. 지혜롭게 대책을 세웠습니다.

 

사도들은 평신도 중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일곱 명을 뽑아, 조금도 미련 없이 교회의 재정과, 관리의 일을 맡겼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일곱 집사들의 이름을 보면, 전부 헬라파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토박이 유대파에서 뽑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하던 헬라파에서 집사 일곱을 선택한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웬만한 은혜가 아니고는, 이렇게 절대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헬라파 사람들도 참 은혜롭지만, 집사직분을 모두 헬라파 사람에게 양보한 유대파 사람들은, 정말 놀라운 신앙인들이라고 저는 생각됩니다.

 

“사도들이 스스로 잘못했다.”고, 시인하고 나오니까, 유대파 사람들은 “아니요, 이것은 우리가 잘못했어요. 이제 이런 실수가 없도록 헬라파에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을 뽑읍시다.”하고, 의견을 모았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일곱 명을 뽑아 구제문제를 다 맡기고, 손을 떼 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면모입니다.

 

이와 같은 교인들이 우리교회 안에 얼마나 있을까요?

저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일곱집사들보다도, 그들을 앞에 내세운 유대파 교인들이 더 부럽습니다.

“서로 양보하고, 서로 위해 주고,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놀라운 모습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사도들도 일곱집사를 선택할 때, 자신들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유대파성도들은 사도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들이 성령의 은혜로, 교회의 문제에 대처하는 모습에서,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의 환부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문제를 일으켰는지, 누가 왜 구제에 빠졌는지”책임을 추궁하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는, 그 순간에 수술을 해야 될 것이 있지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환부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처리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손을 대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도자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근본적이고도, 유일한 치료방법입니다.

 

지도자는, 먼저 하나님과 말씀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고,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부르짖을 때, 교회에 생긴 모든 상처는 아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지혜를 배울 때,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때, 예루살렘교회와 같은 멋진 우리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