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내어드림의 영성 (출애굽기 2:1~10)

Johnangel 2022. 7. 24. 23:55

내어드림의 영성 (출애굽기 2:1~10)

 

오늘은 “내어드림의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길 원합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시기였습니다.

특별히 이때는 모세가 태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의 노예로서 가장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애굽 바로왕의, 박해가 가장 악랄한 시기였을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떻게 돌보십니까?

 

우리 같이 출애굽기1: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애굽사람들이 학대를 하면 할수록,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번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왕은,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가장 먼저 바로왕이 취한 행동은, 히브리 산파들에게 명령하여, 히브리인들의 해산을 도울 때에, 여자아이거든 살려두고, 남자아이거든 해산의 그 현장에서 산모가 정신이 없을 틈을 타서, 남자아이를 죽이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바로왕은, 보다 강력한 방법으로, 자신이 직접 명령을 내려서 법으로 만듭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당시 왕의 말은 법이었고, 더욱이 바로는 당대의 신과 같은 존재였기에, 그의 말을 거역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바로왕은, 자기가 말한 그 법을 지키기 위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레위지파 한 가정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 아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세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미는, 요게벳이라는 사람입니다.

 

요게벳은 임신을 하였음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잘 알릴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마음껏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출생한 아이가 남자아이일 경우에는, 애굽의 병사들에 의해서, 나일강에 버려지기 때문에, 임신한 10개월의 시간 내내 노심초사하며, 임산부로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임신 것을 숨기며, 10개월을 보냈는지도 모릅니다.

 

요게벳은 태중의 아이가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인지를 모르는 상태로, 10개월을 보낸 후에, 아이를 출산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남자아이였습니다.

요게벳은 본문에 보면, 3개월 동안 그 아이를 숨어 키웠던 것 같습니다.

 

우리 같이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2절을 읽다보면, 살짝 오해를 하게 됩니다.

역시 아이도 인물이 좋고 봐야겠구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생아가 잘생겼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잘생긴 것인지 상상이 잘 안갑니다.

 

숫검둥이 눈썹, 매혹스런 쌍커풀, 오똑한 콧날, 앵두같은 입술, 훤출한 이마 등등…

어떤 모습의 아이였을지, 상상이 잘 안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이제 막 태어난 갓된 아이의 모습이 잘생겼다면, 얼마나 잘생겼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조금은 이상하다고 여겼던 부분이, 원어성경과 신약의 병행구절에서, 의문점들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7:18-20절을 보겠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그 남자 아이가 아름다운데, 누가보기에 아름답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즉, 모세의 부모는 아이를 품에 안고, 그저 인물이 좋구나, 내 아들이구나 하는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로 바라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원어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다.”는 표현은, 창세기 1장에서, 세상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표현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렇기 때문에 모세의 부모는, 단지 자신들의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한 아이를 그냥 물에 던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주님도 우리를 보실 때에, 이와 같이 우리를 바라보시리라 믿습니다.

설사 우리가 세상이 말하는,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조건을 가진 존재가 아닐지라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보시고 “아름답다고, 나의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말씀하여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한번 옆 사람을 바라보면서, 인사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최고 걸작품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죽은 자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없으신 그분이, 그의 살과 피를 십자가상에서 다 쏟으시고, 찢기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그들의 품안에 안고 키웠듯이, 우리 주님이 우리를 그의 품에 안으시고, 보호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우리 성도님들 모두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나는 세상에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이냐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랑임을 고백하며, 감사와 감격 속에 살아가는 은혜 있기를 소망합니다.

다시금 본문으로 돌아가서, 아이를 숨겨 키운 지 삼개월이 되어가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이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아이를 숨기어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3개월을 기도하면서,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정성을 다해 키웠지만, 부모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 아이를 애굽의 군사들로부터 살리기 위해 어떻게 합니까?

우리 같이 3절을 읽겠습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 아이의 부모는 갈대상자를 준비해서, 물이 새지 않도록 촘촘히 역청과 나무진으로 방수처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담은, 갈대상자를 나일 강가에 띄우게 됩니다.

 

특별히 갈대상자가 원어성경으로 “테바”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테바라는 단어는, 창세기에서도 쓰여진 적이 있습니다.

어느 때냐면, 노아의 방주가 “테바”로, 쓰여졌습니다.

 

우리 같이 창6:13-14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테바”는, 일반적인 배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방향키, 혹은 돗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정말 볼품없는 배가 바로 “테바”인 것입니다.

그저, 바람과 물결이 이끌어가는 대로 흘러 흘러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보잘것없는 “테바”를 통해서, 노아의 가족을 홍수의 심판으로부터, 건져 내어 주셨습니다.

 

모세의 부모들은, 모세를 나일강가에 갈대상자 테바를 띄우면서, 노아의 방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며,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마치 노아가 그 방주에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듯, 갈대상자의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며,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애굽의 군사와 온갖 나일강가의 독충과 악어떼로부터 돌보시고, 이 아이를 건져내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은,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갈대상자에 누어있는 아이를 숱한 어려움으로부터 지켜주시고, 건져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주의 몸된 교회를, 구원의 방주, 혹은 “테바”라로, 지칭하곤 합니다.

우리 교회공동체를 바라볼 때에도 설사 우리에게 대단한 돗이 없고, 엄청난 엔진이 없고, 정확한 방향키가 없어 보일 수 있어도, 우리 주님이 우리 공동체를 지키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방주, 그 갈대상자, 테바를 지키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크신 손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 있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테바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제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설사 나에게 거대한 돗이 없음을, 나에게 엄청난 엔진이 없음을, 나에게 정확한 방향을 잡는 키가 없음을 가지고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의 몸된 공동체를 강한 손으로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함을 더욱 묵상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 공동체를 선하게 이끄셨던 주님께서 우리를 더욱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풍성한 열매맺게 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내어드림”에 대해서, 생각해보면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내어드림의 모습은, 요게벳과 그의 남편의 모습 속에서 잘 드러납니다.

 

요게벳과 그의 남편이, 보여준 믿음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1.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내어놓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어 놓을 때에, 하나님은 그 테바와 같이 볼품없는 갈대상자에 놓인 모세를 건져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교만하여질 때가 언제 입니까?

내가 모든 것을 다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여길 때입니다.

나의 지혜, 지식, 능력, 물질, 인맥, 건강, 외모가 주님보다 앞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은, 순식간의 거품같이 사라져서, 우리로 하여금 깊은 좌절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설수 없는 자임을 고백하며, 나아가는 저희되길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의 돗이 되어주시고, 방향키가 되어 주시며, 내 삶의 엔진이 되어 주시옵소서. 주께서 나를 둘러싼 어려움과 고난으로부터 지켜 주옵소서. 내 삶의 주도권이 주님께 있습니다. 라는 믿음의 내어놓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2.요게벳과 그의 남편이 보여준 믿음은 무엇입니까?

 

갈대상자를 나일강가에 띄어, 주께 내어 맡기기 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게벳과 그의 남편이 갈대상자를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허술한 갈대상자를 만들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촘촘하게 갈대를 덧대고 덧대어 만들었을 것이고,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진으로 초벌, 재벌 여러 차례 체크하고, 또 체크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또 한 측면은, 우리가 주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을, 치열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주님께 주도권을 내어놓음이, 마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역청과 나무진을 발랐듯이, 우리도 주께 나의 삶을 내어놓기 위해서 드리는 삶,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어놓음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주님께 아낌없이 우리의 삶의 방향키를 내어드림과 동시에, 더 적극적으로 주께서 우리를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도록, 더욱 더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드릴 수 있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