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순교의 피가 흐르다 (사도행전 7:52-54)

Johnangel 2022. 7. 29. 10:42

순교의 피가 흐르다 (사도행전 7:52-54)

 

우리 가운데 예수 믿는 젊은이가 자신의 믿음 때문에, 돌에 맞아 죽는 장면을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 믿는다.”는, 죄목으로 나무에 묶여 화형당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찬송을 부르지만, 한번도 짐승에게 찢겨 순교당하는 그런 장면을 목격한 일도 없고, 우리 자신이 그와 같은 위험에 처한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 이야기는, 사실 우리가 읽기에 대단히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설교준비를 할 때, 저는 수일간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저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흉내라도 낼 수 있어야 설교할텐데, 잘 먹고, 잘 입고, 편히 자고, 조금 걷는 것도 힘들다고,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내가 복음을 위해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의 이야기를 감히 강단에서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은, 겸허한 자세로, 회개하는 자세로,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순교자들의 거룩한 피가 끊임없이 흘려 내렸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무명의 남녀노소 신자들이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죄목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던지는, 거룩한 순교의 광장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죽음과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일 때, 서슴지 않고 생명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주변사람들은 “왜 좀 지혜롭지 못할까? 조금만 지혜롭게 대답하면 저런 위기는 면할 수 있을 덴테, 왜 저렇게 극단적인 태도를 취할까?”하고, 순교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순교는, 지금 우리그리스도인들이 기피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1.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세상이 편해질수록, 환경이 좋아질수록 순교라는 것은,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어떤 사건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독교는 “피의 종교”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려 기독교의 주춧돌을 놓으신 것처럼, 오늘 주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의든 타의든, 순교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문명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피 흘리기를 거부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못했을 것이며,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지금처럼,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 용기 때문에, 생명을 아끼지 않고 던지는, 그 놀라운 믿음 때문에, 이 세상은 서서히 복음으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사도요한에게 “이 땅에 기독교가 존재하는 한, 피 흘리며, 순교하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순교의 피는 흐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수없이 많은 순교의 피가 흘렀습니다.

아마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언젠가는, 또 다시 흐를지도 모릅니다.

자자손손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흐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기독교가 만약 피 흘리기를 주저한다면, 그 생명은 끝날 것입니다.

 

6:9-10절을 읽겠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하나님의 보좌 앞 제단 아래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진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려다가, 죽임을 당한 영혼들입니다.

 

아마 스데반도, 그들 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은 오늘날까지 이 제단 앞에서 “오,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내가 땅 위에서 흘린 피를 언제 신원해 주시렵니까? 어서 심판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의 피, 베드로의 피, 야고보의 피, 폴리갑의 피, 주기철목사의 피, 손양원목사의 피, 그 외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2,000년이 넘도록, 이 제단 앞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지금까지, 이름 없이 쓰러져간 조선 말기의 순교자들, 일제 강점기와 공산주의 아래서, 피 흘린 성도들이 있습니다.

과연 언제까지 그들의 기도가 계속되고, 순교의 피가 계속 흐를까요?

 

6:11절을 읽겠습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흰 두루마기는 예수님의 의의 옷을 상징합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놀라운 의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잠시 동안 쉬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애석하게도 하나님은 “잠시”라고, 하십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몇 천 년인데, 하나님은 “잠시”라고, 하십니다.

 

언제까지입니까?

“그 수가 차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순교자의 수가 있습니다.

그 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순교의 피를 한국교회에서, 얼마를 받으실지, 북한에서 얼마를 받으실지, 중국에서 얼마를 받으실지, 동남아에서 얼마를 받으실지, 인도와 중동에서 얼마를 받으실지 모릅니다.

 

순교자의 수가 차기 까지는, 끝없이 기독교는 피를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예수 믿어야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주님 앞에 산제사로 드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정말 목숨을 제단에 올려놓아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2. 죽을 각오로 살아야합니다.

 

사실 순교자의 영광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은혜 주신 자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 순교자의 대열에 참여하지는 못할지라도, 스데반을 통해 기독교가 피 흘리는 종교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기독교는 생명을 바치는 종교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은 “나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제물로 바친다.”는, 뜻입니다.

이런 각오로 예수를 믿는다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죽을 각오로 살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날마다 죽을 각오로 살아야합니다.

 

나 자신을 당장 제단에 올려 질 순교자의 제물처럼 생각할 때, 비로소 순수한 신앙생활이 가능하지, 살겠다고 애를 쓰면, 신앙생활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처럼 스데반의 첫 순교로부터 하나님이 정하신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우리는 참다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매일 순교를 각오해야합니다.

그래야만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고,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스데반이 죽음으로 내몰린 진짜 이유입니다.

스데반은 어떤 이유로 죽었습니까?

이런 질문을 놓고, 생각한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54절을 보면, 이 사건의 흐름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을 세워 놓고 심문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군중들, 이들의 심리가 어떻게 흐르고 있습니까?

 

54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그들이 들은 이 말,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성전은 이제 하나님이 떠나신 집이다. 그러므로 성전을 우상시 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너희 조상들과 너희들은 똑 같다. 너희 조상들이 성령을 거스려 행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너희 조상들이 메시아를 예언하는 선지자들을 죽인 것처럼, 너희들은 예수 그분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의 가슴을 치는 질책이요, 그들의 양심을 찌르는 무서운 정죄였습니다.

아무리 “양심이 굳었다.”해도, 찔릴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던 군중은,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못하고 이만 갈았습니다.

스데반이 이쯤해서, 입을 딱 다물고, 태도를 누그려뜨렸다면, 아마 돌에 맞아 죽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군중들이 그런대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만 갈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하면, 스데반이 죽은 직접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5-56절을 읽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스데반은, 이를 가는 유대인들에게 기름을 끼얹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다.”고, 증거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였다.”고, 하는 책망에 대해서는, 유대인들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죽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입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한 것입니다.

 

인자라는 말은, 누가 가장 많이 사용한 말입니까?

예수님이 평소에, 자신을 가리켜 즐겨 사용한 호칭이 아닙니까?

이 말은, 성령이 사용하게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군중이 “인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신경이 얼마나 날카로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는, 말은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 저기 하나님 옆에 살아 계신다.”는, 말로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습니다.

마치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자마자 거품을 입에 물고, 법석을 떨었던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인간들이기 때문에 “예수가 살아 계신다.”는, 말을 듣자, 완전히 이성을 잃고, 귀를 막은 채,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돌로 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살아 계신다.”고, 증거 한 것 때문에, 그는 결국 돌에 맞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의 일이 있기 전, 똑같은 자리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스데반은 “그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다.”고, 증거 했습니다.

 

예수님의 증거와 스데반의 증거가, 일맥상통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는 메시아요, 만왕의 왕이요, 하나님이시오, 살아계신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폭도들은, 더 이상 참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본성을 알아야합니다.

사탄은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까지는 긍정합니다.

그러나 한 발짝 더 나아가면, 기를 쓰고 반대합니다.

곧 “죽은 예수가 살아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메시아요, 왕이요, 구주가 되셨다.”는, 진실은, 악을 쓰고 거부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우리는 구름타고 잠시 후에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며, 변질되지 않은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의 영적신랑이요, 우리는 그 분의 영적신부라는 사실을 믿고, 부활하여 지금도 하나님 보좌우편에서, 우리의 기도를 중보하시는 주님께 끊임없이 전심을 다해 기도하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