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에 관한 몇 가지 오해 (사도행전 8:16-17)
사도행전 8장은, 성경전체를 놓고 볼 때, 조금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목사들이나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 본문은 항상 섭씨 100도입니다.
논쟁과 토론이 끝이지 않고, 또 그에 대한 여러 견해들이 상충되어, 항상 뜨겁게 달궈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본문으로 설교할 때는, 상당 부분 자신의 신학적 견해와 확신, 그리고 자기 자신이 체험한 모든 과정을 토대로, 나름의 주관적인 해석을 담아서 말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합니다.
한마디로 교회마다, 목사마다, 해석상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 입장에서도 “이 견해가 옳다.”고, 확신하는 방향으로, 이 본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그 가운데 분명히 잘못된 해석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못된 몇 가지 해석을 정리하기에 앞서, 본문의 대강을 살펴보겠습니다.
빌립이라는, 전도자가 사마리아에 처음으로 내려가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그와 함께 하셔서, 사마리아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온 성에, 큰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 성의 영적지도자인 마술사 시몬까지도, 형식적으로나마 회개하고 돌아와 빌립의 추종자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마리아 부흥소식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사도들은, 이 놀라운 소식에, 급히 모여 협의를 하였고, 사마리아에 새로 탄생한 교회를 방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파송된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은혜 받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바로 성령의 사건입니다.
15-17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이 말씀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이미 물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성령을 받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인들에게 안수기도를 하자, 모두 성령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도, 사실입니다.
이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잠시 뒤로 하고, 먼저 이 본문을 근거로 한 위험스러운 견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물세례와 성령세례는 구별된다는 견해입니다.
①“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하더라도 “2차 성령체험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차 성령체험이 없으면 “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견해입니다.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②세례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면서 “뒤에 오시는 이는 무엇으로 세례를 준다.”고, 했습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성령세례 외에는 없습니다.
만약 예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에, 물세례가 따로 있고, 성령세례가 따로 있다고 해석한다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하신, 성경말씀에 위배됩니다.
요한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주고, 예수이름으로 성령세례를 따로 준다면 말이 되지만 “예수이름으로 물세례를 주면서, 성령세례가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행2:38절을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리하면”이라는 말 때문에, 세례와 선물이 별개처럼 보이지만, 세례와 성령의 선물은, 동시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돌아온 “3,000명에게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별개로 주어졌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물로 세례를 받은 다음에,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어떤 의식도 행했다.”는, 기록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 3,000명이 모두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3,000명은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철저하게 성령세례를 의미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에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다. 중생한다. 죄 씻음 받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한 몸으로 교회가 지체가 된다.”는, 뜻이 전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그 안에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따로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디도서 3:5절을 읽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물을 머리에 뿌리든지, 온 몸을 담그는 침례를 하든지, 그 형식이 어떻든 간에 세례를 베풀 때는,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죄사함 받은 우리의 부정한 것을 씻어주시는, 작업을 우리 안에서 하십니다.
성령 없는 물세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떼어놓고, 물세례만 있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중생도 불가능하고, 죄 씻음도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물세례를 단순히 하나의 의식으로만 보고, 성령세례를 따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무시하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2.또 하나 잘못된 해석은 “안수”를 성령 받는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받게 하기 위해 안수하는 부분은, 이 본문과 행19:6절 단 두 곳뿐입니다.
행19:6절을 읽겠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안수를 해서 성령 받는 것은, 이 두 곳 외에는 없습니다.
성령은 안수 없이도,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하셨습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에게도 안수 없이 임했고, 이방인 고넬료에게도 안수 없이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모든 성도가 일일이 다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면, 큰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됩니까?
안수를 마치 자신들의 독점물처럼, 생각하고 행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인 교황, 혹은 신부가 안수하는 것을, 특별한 권위로 보는, 잘못된 해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일부에서는 “성령을 받게 한다.”는, 명목으로 안수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또 반드시 “안수를 통해야만 성령이 임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세례식과 성찬식처럼, 마치 안수식을 하나의 성례식처럼 행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잘못된 큰 모순이고, 자칫 엉뚱한 방향으로, 성도들을 이끄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성령은 무엇으로 받습니까?
성령 받는 조건은 하나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습니다.
세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세례의 조건입니다.
학습을 받고 6개월 후에 세례를 받는 것은, 교회가 정한 질서일 뿐이지, 절대적인 성경의 원칙이 아닙니다.
그저 단순한 질서입니다.
믿음 있는 자에게 성령은, 역사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신약성경을 덮어야 할 것입니다.
안수라는 것은, 교회의 의식으로 행할 수는 있지만, 성령이 안수를 통해서만, 임할 수 있고, 안수 받은 자의 능력을 통해서만, 성령이 역사한다고 보는 것은, 교회에 대한 무서운 영적독재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교회에서 안수 때문에 일어나는, 많은 부작용은,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을 가장해서 역사하는, 사탄의 세력을 철저히 분석하고, 악한 영과, 참된 영을 분별할 줄 알아야합니다.
3.또 주의해야 할 잘못된 견해는 성령 받은 증거가 방언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같이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술사 시몬이 성령 받는 것을 “‘보았다.”는, 말씀을 근거로 하여, 그 본 것이 “새 방언”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새 방언을 했기 때문에 “마술사 시몬이 그것을 보고 성령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옳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성령사건의 특수성을 염두에 둔다면, 이 해석은 타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모든 사람이 새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성령강림을 깨달았듯이, 사마리아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옳은 해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마술사 시몬이 “보았다.”고, 하는 것이 “방언”이라고, 성경에 단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증거는 방언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성령 받은 사람이 방언을 했다.”는, 기록은, 세 곳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사도행전에서만 나타날 뿐입니다.
이렇게 특수하게 나타나는 예를 근거로 하여, 성령이 임하는 보편적인 증거를 방언이라고 자꾸 고집하면 “방언이 없다면, 성령세례 못 받은 것”이라는, 결론이 나고 맙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나,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이적 기사를 나타내는, 큰 인물 중에는, 방언이 없는 분도 많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령과 방언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방언을 주셨으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요,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또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더욱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방언을 받지 못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은사를 찾아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것이든 저것이든 감사할 줄 아는 것이, 가장 좋은 자세입니다.
방언을 체험한 사람이나,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나, 그 마음에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믿음이 있다면, 모두 성령의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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