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흩어진 자와 남은 자 (사도행전 8:4~6)

Johnangel 2022. 8. 25. 10:25

흩어진 자와 남은 자 (사도행전 8:4~6)

 

사도행전 8장을 읽다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루살렘교회를 흩으시는 중에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렇습니다.

열두 사도는 핍박 가운데서도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해석하기가 퍽 어려운 부분입니다.

 

1. 이 말씀에 대한 신학자들의 몇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왜 사도들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는가?”하는, 의문에 대한 해석입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은, 본토박이 신자와 교포신자, 즉 유대파와 헬라파 신자, 두 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그 가운데 교포로 살다가 예루살렘에 온 유대인이었고, 당시 예루살렘에는 교포신자들이 오순절을 통해 많이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핍박은, 이 두 파 중에, 스데반이 소속되어 있는 교포신자인 헬라파 교인들에게 집중됐습니다.

 

때문에 유대파 교회에 소속된 사도들에게는, 핍박이 미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사도들과 본토박이 신자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사도 외에는 다 흩어졌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무슨 헬라파, 유대파가 있습니까?

또한 성경은 분명히 “다 흩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사도들의 권위와 덕망이 예루살렘에서 너무나 두드러졌기 때문에, 감히 핍박자들이 사도들에게는 손을 대지 못했다.”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도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핍박이 일어날 때 누가 제일 먼저 잡혀갑니까?

핍박의 역사를 보면, 가장 먼저 핍박의 대상으로 삼는 대상은, 대부분 지도자입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를 꺾으면, 나머지는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사도들의 권위가 대단하고, 덕망이 높았다고 할지라도, 핍박자들이 사도들에게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얼른 들지 않습니다.

따라서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셋째는,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 중에서 제일 영향력이 가진 사람은,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교법사로 바울의 스승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특별히 배려를 해서 사도들의 신병을 지켜 주었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도무지 근거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건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은 “사도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다.”는, 해석입니다.

 

성경에 “사도들이 핍박을 받지 않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모두 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핍박에 위협을 느낀 신자들이, 밤중에 몰래몰래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루살렘교회를 사수하기 위해, 또 감옥에 잡혀 들어간 수많은 남녀 신자들을 생각해서, 예루살렘의 떠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남아 있었습니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북한에서 한창 공산당의 핍박이 있을 때, 북한의 많은 신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남한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교회를 사수하다가 죽겠다.”며, 끝까지 내려오지 않고, 결국엔 순교하신 이기선 목사님 같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사도들도 “그런 자세로 남아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핍박을 피해 흩어진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흩어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이 흩어진 사람들보다 더 경건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사도들은 자기 양심과 교회를 위해, 나름대로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 있는 모든 목사가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교회를 끝까지 지키고, 양 떼를 위해 헌신하는 목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날 목사의 이미지는 어떻습니까?

자기 가족의 안전이나, 자기 자식의 성공, 혹은 자신의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서, 항상 다른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서 처신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과거에 비해, 오늘날 영적권위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처럼 자기 생명을 내놓고, 교회를 위해 흔들림 없이 지도자의 위치를 지키는, 목사님들이 한국교회 안에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5절에 등장하는 전도자 빌립 집사입니다.

 

21:8절을 읽겠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여기에 보면 바울이 빌립에게 “전도자”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아니라,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는 스데반처럼 헬라파 신자였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집사로서 교회 안에서 자기 역할을 맡았습니다만, 구제하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그는 복음증거 하는 일을 최우선에 두고 살았기 때문에 “전도자 빌립”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6:3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빌립은 일곱 집사가 선택받을 때, 증명되어 있는 바와 같이 세 가지 면에서,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첫째,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칭찬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성령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이 하는 일에는 큰 열매들이 따라왔습니다.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가 전도하면,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셋째, 그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뱀같이 지혜로웠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자신의 생활 속에서, 증거 하기 원하는 평신도나, 또 빌립처럼 전문적으로 증거 하기를 원하는 전도자에게 “좋은 평판”과 “성령의 능력” 그리고 “지혜” 이 세 가지는 필수요건입니다.

 

전도자가 인격이나 삶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예수를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의 눈에 목사의 잘못된 부분이 분명히 보이는데,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귀에 들리겠습니까?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로 서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것처럼, 자기 절제에 대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자가 화내고, 싶은 대로 다 내면, 그 사람은 예수를 증거 하지 못합니다.

또한 전도자가 봉사하는 일에 몸을 사리면, 그 사람은 절대 전도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옆에 있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한 푼도 내놓지 않고, 과연 전도가 되겠습니까?

이웃에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한번 찾아가서 위로할 줄도 모르고, 그저 무관심하게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 예수그리스도가 증거 되겠습니까?

 

장사할 때 한 푼이라도 더 남기려고, 거짓말하는 등. 양심에 거리끼는 생활을 한다면, 그 사람이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전도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 앞으로, 사람들을 인도할 만한 감화력이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우리를 보고, 매력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뒤에서, 욕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스스로 자신을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3. 빌립 집사는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전도지를 택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치고, 사마리아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나오듯이, 사마리아인도 유대인을 싫어하고, 유대인도 사마리아인을 개처럼, 취급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곳으로 전도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남들이 꺼리는 곳, 전도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사마리아를 찾아가 그곳에서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선교지와 전도할 대상을 자신의 기호대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한 명도 전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금지하는 나라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할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또한 전도받기를 꺼리는 사람들, 사람 사귀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갈 전도자도 필요합니다.

 

교회는 그렇게 해야합니다.

사마리아를 찾아간 빌립은, 오직 예수만을 증거했습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복음의 증인은, 예수 외에 다른 것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빌립처럼, 복음의 증인이 되어, 큰소리로 복음의 나팔을 불수만 있다면, 우리를 통해, 분명히 복음의 역사는,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