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하시다 (사도행전 8:14~16)
제가 지난주에 사도행전 8장은, 성경전체를 놓고 볼 때, 조금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목사들이나,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 본문은 항상 섭씨 100도입니다.
지금도 논쟁과 토론이 끝나지 않고, 또 그에 대한 여러 견해들이 상충되어, 항상 뜨겁게 달궈져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본문으로 설교할 때는, 상당 부분 자신의 신학적 견해와 확신, 그리고 자기 자신이 체험한 모든 과정을 토대로, 나름의 주관적인 해석을 담아서 말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합니다.
한마디로 교회마다, 목사마다, 해석상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 입장에서도 “이 견해가 옳다.”고, 확신하는 방향으로 이 본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그 가운데 분명히 잘못된 해석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세례 사건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야말로 복음의 첫 꽃망울이 터지던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첫 서광으로 환하게 비치던 그때는, 오늘날과 다르게 성령이 임하시는 역사가 계속 눈에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서는, 조금 다른 인상을 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그렇습니다.
이제까지 세례를 받을 때 임했던, 사마리아에서는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은 왜 이와 같은 예외적인 일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이 예외적인 사건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1. 예외적인 사건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 보편적인 일이 어느 곳에서 예외가 되었을 때,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학적인 해석이요, 성경적인 해석입니다.
여기 사마리아에서의 예외적인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빌립을 통해 세례를 줄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을 눈여겨봅시다.
빌립에게 어떤 결함이 있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역사와 무관한 사람이 아닙니다.
26절이하의 내용에 나오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신하요, 내시 사건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수레를 타고 가며, 이사야서를 읽던 에디오피아 내시가 빌립을 통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빌립이 베푸는 세례를 받습니다.
38-39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세례를 주고 물에서 올라온 빌립을 누가 데리고 갔습니까?
주의 영이었습니다.
빌립은 주의 영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사람인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을 때, 성령이 특별히 임하는 역사가 따르지 않았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빌립이 “물세례를 주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없지만, 분명히 물세례와 함께 성령세례가 내시에게 역사한 것이 사실이고, 그 결과 내시는 예수 믿은 큰 기쁨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서는, 빌립의 세례에 성령이 임하신 어떤 외적인 증거가 보이지 않습니다.
세례와 성령 임재, 이 두 가지는 항상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서는, 물세례만 있고, 성령 임재의 증거가 없습니다.
이 부분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완전한 해석은 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묵상하며, 갖게 된 확신을 통해, 말씀을 해석해 보려합니다.
그러나 “이 확신 또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본문은 어려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의 역사 없는 물세례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에서,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떼어 놓으신 이유는, 앞으로 이 성경을 읽는 모든 교회에게,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하나요, 동시적이라는 것을, 강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따로 구분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두 사도가 사마리아의 이 현상을 보고 “이것이 정상이 아니요, 예외적이라.”고, 받아들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따로 구분되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하나님께서 이 교훈을 교회에 주시기 위해 사마리아에 예외적인 사건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일부러 음식과 소금을 따로 내놓고 간을 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자녀들은 “이때 음식의 맛과 소금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여러 사건 중에, 유독 이 부분에서만,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따로 나뉜 것처럼 보이게 하신 이유는,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어떤 증거가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얻으며, 중생의 사람이 되고, 교회의 한 몸이 되는 사람에게 성령이 세례와 함께 임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이 말씀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이미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3. 같은 복음, 같은 성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마리아의 성령사건을 의도하신 이유가, 또 하나있습니다.
사마리아는, 복음이 이방으로 전파되는 요충지였습니다.
사마리아는, 성령을 받고, 큰 권능을 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를 거처 땅 끝에 이르기 전에,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유대나라와 이방나라 사이를 연결하는, 문턱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 지역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행10장에 나오는 고넬료 사건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은 “이방인은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향해 높은 벽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유대인의 생각과는 달리, 예루살렘에 주셨던 오순절 성령사건을 사마리아 신자들에게도 뚜렷하게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것도 사도 중의 사도로 인정받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뚜렷하게 보여 줌으로써, 복음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평등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자나 사마리아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자나 하나님께 성령 받은 자의 예배는 동일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 될 수 없지만 “예수의 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처럼 남종과 여종에게, 자녀에게, 늙은이에게, 젊은이에게 골고루 임하게 될 성령의 선물입니다.
욜2:28-29절을 읽겠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하나님은 예루살렘교회 “특별히 사도들에게 복음 앞에서는 모두 다 평등하다.”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해, 이 사건을 일부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오순절 체험은, 성경 몇 곳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는 사마리아에서, 세 번째는 이방인 고넬료 집이 있는 가이사랴에서, 마지막으로 에베소가 있는 소아시아 지역입니다.
4. 성령체험 없어도 성경이 확증합니다.
오늘날에는 왜 세례 받을 때, 이런 성령의 역사, 눈에 보이는 어떤 증거들이 잘 안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성령이 세례와 함께 임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이 눈으로 보여 주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눈으로 보고 어떤 체험을 통해야만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된 다음에는, 체험이 따르지 않아도 진리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함께 하시고, 성령 받는 역사가 내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성경은 여러 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완성된 성경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에게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보여 줄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어도, 귀에 들리는 증거가 없어도, 성경말씀을 통해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섭리와 뜻이 있을 때에는, 오늘날에도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눈에 보이게 임하시는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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