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누구신가? (마태복음 16:13~17)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수만 명이었지만, 그중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똑바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자, 그들은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도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마16: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아주 만족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베드로의 대답은, 그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만 명이 모여도, 베드로와 같은 이런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을 가리켜서도 “주”라고, 부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창23:6절에 보면,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라고, 했고, 창32:4절에서는,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고, 불과 몇 십분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 쌍둥이 형에게 “주”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 “주”라고 하는 것은, 힘이나, 권세가 있는 사람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그러나 종이 자기 주인에게 “주”라고, 말할 때에는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시대에 종은, 주인의 소유물이자,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은 자기의 것이 없고, 목숨과 몸도 주인의 것이고, 주인의 뜻대로만 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 예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로마제국의 바로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와 국토와 백성과 재산이, 모두다 군주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명령이 떨어지면, 모든 것을 다 내놓아야 하고, 무조건 복종해야했습니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군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에도 지구상에 남아 있는 군주가 한 사람 있는데, 바로 북한의 김정은입니다.
나라의 재산은, 모두 자기의 것이고, 백성들이 굶어 죽어도 상관이 없이, 자기는 넓은 집에서 배부르게 삽니다.
로마제국의 황제 가이사는, 온 백성들이 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주”라고 불렀고, 황제 네로는 강제적으로 백성들에게, 자신을 신과 같이 여기도록 강요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왕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첨하는 자들의 칭찬에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대접을 받으려고 하자, 벌레가 그 몸을 먹어서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자가 아무리 신과 같은 영화를 누려도, 한낱 벌레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황제들이 기독교를 핍박한 이유 중의 하나는, 황제만을 “주”라고 해야 되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리켜 “주”라고 말한 사람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서야, 그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순교를 각오하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롬10:9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것이 너무나 쉬운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담대한 믿음이 필요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 롬10:13절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항상 예수님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지진이 나서, 간수장이 달려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느냐?”고, 물었을 때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주”라고 고백한 것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철저하게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바울은 롬14: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는 오직 주님만 위해서 살기 위해, 자신을 위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결혼도 할 수 있었지만, 결혼하지 않았고, 재산도 모을 수도 있지만, 재산도 모으지 않았으며, 부귀영화를 포기했습니다.
그는 사도로서, 교회에서 대접받고, 영광을 얻을 수 있지만, 그것 또한 전부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렇게 살 수 있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믿음의 문제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느냐?”하는,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원해서,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은 디베랴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베드로에게 요21:15절에 보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이 말씀을,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묻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요21:15절을 보면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주님께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의 양이요, 주님의 지체인 교회의 성도들을 사랑하는가?”를 확인한 후, 주님의 일을 하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해서, 기쁨으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십니다.
헌금을 해도 인색한 마음으로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면, 주님께서 감동을 받으십니다.
그뿐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 주님이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게 되었을 때, 이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고, 죽음도 두렵지 않았기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그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어, 오늘날 이 지구촌 안에 수십억의 기독교인이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가셨을 때,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만나신 수가성 여인은,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4:9절을 보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4:15절을 보면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예수님에게 “주”라고 합니다.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요4:19절에는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4:25-26절에서는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메시아를 만난 기쁨이 너무 커서, 물동이도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서, 요4:29절에 보면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수가성 사람들이 모두 달려 나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변화되는 과정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알게 되는 만큼,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십니까?
예수님을 누구라고 전도하시겠습니까?
도마는 요20:28절에서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 본 후에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서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은 기독교를 핍박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평생 헌신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됩니다.
저도 주님을 만난 후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저는 금식하며,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무조건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고, 그 뜻을 따라 살다보니,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변화된 수가성 여인을 생각해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그 몸의 상처를 만진 후에, 변화된 도마를 각해보십시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생 동안 교회에 다니고, 예배를 드리지만, 주님을 만난 체험이 한 번도 없는 것,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그 사람이 목사든지, 장로든지, 권사든지, 집사든지, 직분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난 자와 만나지 못한 사람과는, 생각과 말과 행동, 그리고 삶의 목적과 자세, 가치관이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주님을 만난 체험을 한 사람들은, 자원해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알고,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주님을 만난 사람들로, 가득 차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를 위해서 살고 싶은 사람이 많아서, 모든 일에 자원해서, 봉사하고, 충성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스러기 은혜라도 (마가복음 7:24~30) (0) | 2022.09.18 |
---|---|
거짓 믿음이 드러나다 (사도행전 8:18~20) (0) | 2022.09.15 |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하시다 (사도행전 8:14~16) (0) | 2022.09.08 |
건강한 그리스도인 (히브리서 10:19~25) (0) | 2022.09.05 |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41:8~10) (0) | 2022.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