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으로 그릇으로 택하시다 (사도행전 9:15)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지금까지 자신을 붙들고 있던, 모든 의미와 신념, 신앙과 고집과 분노가, 한순간에 꺾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는, 눈이 멀어, 남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자신이 예수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데, 그치지 않았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하시는데, 그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계획대로, 사울에게 그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를, 환상 중에 불러 사울을 찾아가, 안수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아나니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울이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으로 향할 때, 그의 손에는 체포자 명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 아나니아는, 아마 1순위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약간의 근거는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요, 율법을 따라 사는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울에게 가장 먼저 희생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런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찾아가라고 하시니, 아나니아도 사람인지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황한 아나니아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설명은 한마디로 “아나니아야, 걱정하지 말고 사울에게 가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은혜로운 손길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거운 일을 시키실 때, 마치 종을 부리듯이, 무조건 명령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불러 뜻을 이루고자 하실 때, 부름 받은 사람이 준비가 안 되어 있거나, 또한 주님의 명령을 납득하지 못할 경우, 설명해 주시고, 납득하도록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고등동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마음에서 우러나와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시고, 아나니아가 스스로 일어나, 사울에게 찾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서, 주님은 똑같은 방법을 쓰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를 끌고 가듯이, 그렇게 억지로 시키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고집을 피우고, 어떤 때는 선뜻 발걸음이 내디뎌지지 않아 괴로워할 때도, 주님은 기다려 주십니다.
그분이 뜻하신 곳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자비로우신 주님, 인자하신 주님, 우리의 처지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아나니아에게도, 주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참 놀라우신 주님입니다.
한마디로 “가라”고 하시면 그만일 텐데, 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메시아를 잉태할 것이라고 전하는, 대목을 성경은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제가 볼 때는 천사와 마리아 사이에, 상당한 대화가 오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일을 단박에 납득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그것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십시오.
마라아가 천사의 말을 납득하고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주신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우리는 사랑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체질을 아시고, 기다려 주시고, 설득시켜 주시는, 우리 주님을 사랑합니다.
귀로 들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지만, 나의 이성과 지성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시고, 그 다음에 가벼운 일이든지, 중요한 일이든지, 내게 맡겨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명령대로 사울에게 갔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가서 “형제 사울아!”하며, 머리에 손을 얹고 “주께서 나를 보내 너로 보게 하시고 성령 충만하게 하신다.”고, 기도할 때, 그 두 사람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과정을 기록한 본문을 보면, 세 가지 용어가 나옵니다.
10절에서, 아나니아를 “제자”라 칭하고, 13절에서는 “성도”라고 칭하고, 17절에서는 “형제”라는 말이 나옵니다.
짧은 본문 안에서, 제자, 성도, 형제라는, 세 가지 명칭이 나옵니다.
아마 당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통용되던 용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1)“제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데테스”인데, 이는 “배운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배우는 것입니까?
스승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2)“성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인데,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좀 강한 의미로 “한쪽에 결별을 선언하고, 다른 쪽과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더러운 세상과 결별하고, 거룩하신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 동행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3)“형제”라는 말은, 막연한 이웃이 아니라 “네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말씀처럼, 특히 신약에서 언급되는 “형제”는, 예수의 피로 하나 된 사람, 신앙으로 하나 된 사람을 일컫습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삶과 인격을 닮아 가기로 작정한 “제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경건한 “성도”의 신분으로, 원수 된 사울을 찾아가 “형제여”하고 부르며, 기도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예수 안에서만 가능한 드라마요, 성령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감동입니다.
사울처럼 길에서 만났든지, 성경을 통해 만났든지, 아니면 교회를 오래 다닌 경험을 통해 만났든지 간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만난다면, 누구라도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사울의 일생을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님은 사울에 대한 계획을 아나니아에게 들려주시며, 사울을 가리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가지 의미로, 주님께서 “그릇”이라는, 표현을 쓰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릇은 자기 선택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쓰는 대로 그저 사용될 뿐입니다.
사울의 생각은 어떤지, 하나님께서 물어보시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주방에 들어가 원하는 그릇을 선택해서, 마음대로 사용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그렇게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신다는 의미에서 “그릇”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담는다는, 의미에서 “그릇”이라는 말을 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그릇에 보배를 담으십니다.
사울이라는 연약한 그릇에, 하늘의 지혜와 보화를 담으셨습니다.
그 선물을 받아든 사울은, 사도바울이 되어, 이방인과, 임금들과 ,유대인들 앞에 나아가, 그대로 전해 주었습니다.
아나니아나 바울이나, 똑같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종이지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각각 달랐습니다.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그 두 사람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릇이 원한다고 큰 그릇이 될 수 없고, 그릇이 원한다고 좋은 것을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우리가 바울같이 되게 해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시면,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우리가 아나니아 노릇만 하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많은 해를 받을 그릇으로 택하셨으면, 아나니아처럼 다메섹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대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그릇”이라는, 소명을 가져야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사용하시는 그릇이라는 소명은, 각자 받은 은혜의 분량대로 일을 맡을 때, 큰 일이 있고, 작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든지 작든지, 어느 것은 귀하고, 어느 것은 천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목사입니까?
장로입니까?
권사입니까?
집사입니까?
목장의 목자입니까?
주일학교 교사입니까?
성가대원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셔서, 이 일을 맡겨 주셨다는, 사명을 꼭 갖기 바랍니다.
이렇게 사명감과 소명의식을 갖고, 움직일 때는, 불평이 없습니다.
힘이 들어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일을 하도록 택함 받은 그릇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이지, 사람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만 있으면, 사울처럼 아무리 많은 해를 받아도, 끝까지 주님 앞에 성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고 하는, 확신이 없으면, 끝까지 충성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일생만, 작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일생도, 하나님이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길을 걸어가든지, 이것은 내 마음대로 선택해서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대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이럴 때, 우리 인생의 걸음이, 우왕좌왕하지 않고, 우리는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길을 걸어가며, 끝까지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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