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응답받는 기도 (느헤미야 1:11)

Johnangel 2022. 10. 8. 21:10

응답받는 기도 (느헤미야 1:11)

 

오늘의 본문에서 소개되는 신흥제국 페르샤의 아닥사스다 왕 1세는, 무엇보다 이스라엘 재건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왕이었습니다.

에스라서 4장에 보면 “이미 한차례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 성곽의 건축을,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하여, 공사 중단을 명령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기도를 응답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성 재건에 가장 부정적인 아닥사스다 왕을, 기도응답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아직도 최선의 기도응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응답받는 기도는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1.기도의 장애가 옮겨져야 합니다.

 

기도응답을 방해하는, 여러가지 장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장애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신의 죄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기도 대상자의 삶속에 있는, 죄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사59:1-2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나아올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응답의 장애를 옮기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죄의 장애를, 옮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복, 혹은 신약적인 표현으로 “자백”하는 것입니다.

 

요일서1: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처럼, 성도의 신실한 죄의 자백은,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힘없는, 기도의 통로를 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기도를 시작하며, 먼저 자신과 자기의 조상들의 범죄함을 자복합니다.

6-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는 자기의 조상들의 범죄함을 자복하면서 “나와 나의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라고, 자신의 책임을 또한 포함시키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느헤미야는 자신들의 죄와 악을, 합리화시키거나, 미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축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교인 몇 사람이 주차가 금지된 곳에 차를 주차하며, 양심에 꺼렸던지, 한분의 아이디어로 창문에 “15분간 이 근처를 돌았습니다. 주차안하면 직업을 잃을 것 같아 할 수 없이 여기에 주차합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메모를 남겼답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나와 보니까, 위반 티켓이 붙어 있었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 근처를 15년간 돌고 있습니다. 티켓을 드리지 않는다면 직업을 잃을 것 같아 할 수 없이 위반 벌금을 드립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이것을 우리는 관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볼 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래 자백이란 말은, 죄를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지한 기도는,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도의 장애가 옮겨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기도의 통로가 열리는 것입니다.

 

2.기도의 근거를 주장해야 합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한 가지, 현저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응답받는 기도에는, 기도의 성경적 근거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약4: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즉 야고보는 응답하지 못하는 기도에는, 잘못된 근거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기심이라는, 비성경적 근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성경적 근거란 무엇입니까?

기도의 가장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믿고,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맹목적이거나,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느헤미야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8-9절을 읽겠습니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 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느헤미야는, 주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셨던 말씀을 주장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구하고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성경적 기도의 가장 분명한 정의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방편, 혹은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방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하는 백성들이 되기 위해,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우리의 기도의 근거가 되게 합시다.

그것이 바로 응답받는, 기도의 비밀입니다.

3.기도의 대상을 신뢰해야 합니다.

여러분, 누가 우리의 기도 대상입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당연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얼마나 자주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마치 하나님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제 아내가 저와 대화중에,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 아내뿐만 아니라, 아마 이 세상 모든 아내의 공통된 특성일 것입니다.

그것은 대화를 나누 중에, 다른 사람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화대상을 바라보며, 대화를 하는 것이, 나누어지지 않은 관심과, 신뢰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면에서,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기도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만이 소망임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께만 소망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느헤미야의 경우,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아닥사스다 왕이었습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날마다, 그를 만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즉시 자기의 문제를 왕에게 아뢰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물론 그는 현실적으로, 아닥사스다 왕의 행정적인 결재가 없이는, 예루살렘성의 중건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느브갓네살 왕의 결재에 앞서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결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움직이셔서, 허락하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많이 듣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만사는 인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인사는 천사”입니다.

사람의 일은 궁극적으로 하늘의 일인 것입니다.

사람을 움직이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왕을 통해, 이 허락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그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을 움직이셔서, 그의 신임과 허락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쉽게 이 문제를, 왕에게 말하지 않고, 기도만 계속했다는 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한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이나,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시편기자처럼,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62:1-2절을 읽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여러분, 기도의 응답을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기도의 대상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지금도 그의 자녀들을 자상한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1:12절에서는 “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그의 능력을 신뢰하시고, 기도할 수 있으시다면,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제 당신의 문제를 갖고,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그분을 슬프게 했던, 당신의 모든 죄를 자백하며,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겠다고, 고백하여 보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황폐한 삶의 마당에, 견고한 은혜의 성곽이 건설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당신은 날마다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는, 신기한 삶을 살아가시게 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