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룻에게 나타난 구원 역사 (룻기 4:13~22)

Johnangel 2022. 10. 10. 12:20

룻에게 나타난 구원 역사 (룻기 4:13~22)

 

룻기를 각 장 별로 요약하여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장의 내용은 “남편을 잃고 버려진 여인들의 고통과 눈물”이요, 2장의 내용은 “하나님을 향한 은혜의 눈빛”이며, 3장의 내용은 “안식을 기다리는 여인”이고, 4장의 내용은 “행복한 결혼식”입니다.

그리고 이 결혼식은, 천국혼인잔치의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따라서 룻기의 전체요약은, 한마디로 “인생역전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의 시작인 4:13절의 “이에”라는, 접속사 단어 하나가, 룻기의 모든 내용을, 다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한절에서,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고, 그렇게 후딱 10개월이 지나갔습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룻이 “결혼한 후 참으로 행복했던 10개월이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룻기 저자는 “여호와께서 룻으로 임신하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다시 말해서 “룻의 임신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고백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한마디 고백을 통해, 보아스와 룻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결혼을 했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임신을 했고, 하나님의 구원성취를 위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는 말씀은, 그 간에 있었던, 룻의 모든 비극과 눈물, 모든 괴로움과 염려를, 한방에 털어버리는 말씀입니다.

 

1. 축복의 여인입니다.

 

14-17절을 보면, 며느리 “룻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베들레헴 마을에 전해지자, 여인들이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찾아와서, 축하인사를 합니다.

축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4-15절을 읽겠습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여 일곱 아들 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그동안 나오미는 1장에 보면, 이방 땅에서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잃고, 인생의 모진 풍파에 시달리다, 삶의 의욕과 기쁨을 다 잃어버리고, 그의 영혼이 탈진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며느리 룻이 자식을 낳아주므로 말미암아, 나오미의 영혼이 소생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 장면을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아이로 말미암아 나오미의 괴로움이 다시 기쁨과 환희로 회복되었다.”

그렇습니다.

이 상황을 룻기 저자는 “생명의 회복”이란, 말로 정리합니다.

사실 베들레헴 여인들은, 의례적인 축하인사를 하는 것 같지만, 그 축복의 내용은, 성령의 감동을 전하는, 하나님의 계시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여인들의 축복이, 참으로 정교하고도 세련되어 있습니다.

그 축복 가운데 보면, 베들레헴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룻을 가리켜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 보다 귀한 네 며느리”라고, 칭송합니다.

이 기록을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잘 키운 며느리 하나 일곱 아들 안 부럽다.”는, 뜻입니다.

 

당시 인간적으로 보면, 보잘 것 없었던 이방의 여인 룻이었지만, 그녀는 복덩어리요, 복의 근원이며, 축복의 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복덩어리였습니다.

 

나오미는 룻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소생되었습니다.

룻은 나오미 노년의 보양자가 되었습니다.

일곱 아들 보다 귀한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여기 “일곱 아들”이란, 이 땅에서 어버이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룻은 남편 보아스에게, 복덩어리였습니다.

보아스는 룻과 함께, 인류구속의 계보, 메시아 족보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보아스의 가문은, 유명한 신앙의 명문가로 거듭났습니다.

 

룻은 베들레헴을 복되게 만든 복덩어리였습니다.

무명의 마을이 룻이 낳은 아들과 함께, 다윗 왕의 고향 베들레헴이 되고, 메시아이신 예수가 태어나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 민족의 복덩어리요, 온 인류의 복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모든 이방 족속의 복 덩어리 “생명의 회복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대단히 재미있는 사건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부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일반적으로 그 아이의 아비나 아니면, 집안의 어른이나 아니면, 학식이 있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이름을 부탁하여 지어주는데, 보아스와 룻이 결혼하여 낳은 이 아이의 이름은, 베들레헴 마을의 여인들이 몰려와서, 지어주었습니다.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오벳”이라는, 이름입니다.

여기 “오벳”이라는, 이름의 뜻은 “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아이가 너의 노년에 섬겨줄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아이가 될 것이다. 오고 오는 세대에 인류를 섬기는 아이가 될 것이다.”라는, 뜻으로 “오벳”이라고, 이름을 짓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아이는, 베들레헴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집니까?

“이 아이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베들레헴 마을의 관심은, 온 이스라엘의 관심으로 번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랑과 관심은, 우리 모든 인류 역사의 관심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 인류역사는, 이방 여인 룻이 낳은 후손을 통해 얻은 예수그리스도라는, 한 아기로 말미암아 BC와 AD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2. 베레스입니다.

 

18-22절은, 룻기의 결론입니다.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알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몽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계보는, 일반적으로 앞부분에 나옵니다.

그런데 룻기서만은,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 계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왜 하필이면 베레스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보라!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라는 뜻인데, 이 계보는 다윗 왕까지 이어집니다.

 

12절에 보면,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보아스를 축복하며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베레스가 누구입니까?

창세기 38장에 보면,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넷째인 “유다”의, 별로 좋지 않은 내용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는, 젊은 날에 잠시 동안 신앙적으로 침체되어, 아버지 야곱의 집을 떠나서, 이방 땅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방 여인을 만나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첫째, 아들 엘과 결혼한 여인이 다말입니다.

그런데 엘이 자식 하나 낳아주지 못하고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도, 역시 다말과의 관계 속에서 죽습니다.

그래서 시아버지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그녀의 친정집으로 보냅니다.

그러나 이방 여인 다말은. 유다의 집에 메시아의 약속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자식 낳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지 유다가 “자기 친정집 가까이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말은 창녀로 위장하고,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여,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의 징표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얻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유다는, 사람들로부터 자기의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말을 불러 죽이려고 합니다.

이때 다말이, 형장에서 내민 증표인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고, 유다는 그 며느리 다말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며느리 다말이 때가 되어, 해산을 하고,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 첫째 아이가 바로 “베레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여인, 다말이 낳은 베레스와, 지금 룻이 낳은 오벳과는, 어떤 관계가 있기에, 여기 룻기는, 야베스를 시조처럼 족보에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창세기의 다말과, 룻기의 룻은, 유다 집안의 메시아 족보가 끊어질 위기에서, 메시아의 약속을 믿었던 이방여인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대를 이어가려는, 열망이 있었던 이방여인들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인류구원역사의 대를, 이어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의 열심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려는, 그 계획을 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열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바로 이방 여인 다말이요, 룻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 인류구원을 위한 열망이 얻은 아들이, 바로 창세기의 베레스요, 룻기의 오벳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말은, 이스라엘의 아들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여, 베레스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룻은, 이스라엘의 아들을 얻기 위해, 고향 땅 자기 동족과 자기가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개종하여, 시어머니를 쫓아와 얻은 아들이 오벳입니다.

 

여러분, 이제 왜 룻기서 저자가, 베레스와 오벳을 연결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다윗을 말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당신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당신을 축복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끊을 자도 없는 것입니다.

룻기서의 족보는 “하나님의 구원의 폭이 얼마나 광대하고 엄청난 것인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여인 다말이, 시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얻은 아들 “베레스”를, 구원역사 중심에 세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족보를, 조금도 괘념치 아니하시고, 룻기에 당당히 기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그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나았더라.”

 

룻기는, 사사기의 연속편입니다.

사사시대는, 왕이 없었던 시대였습니다만, 룻기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태어났다.”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룻기의 마지막 단어가, 바로 “다윗”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을. 다음 책인 사무엘서로 넘겨줍니다.

룻기는 다윗으로 끝이 나지만, 신약성경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다시 다윗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결국 룻기는, 예수그리스도로 끝이 납니다.

따라서 룻기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거대한 구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는, 룻기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두 가지 큰 도전을 줍니다.

 

룻기 마지막은, 우리에게 구원계보의 큰 도전을 줍니다.

 

지금도 여전히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았다.”는, 구원의 계보는, 계속해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낳아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영적아비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누구와 누구를 낳았습니까?

혹시 당신에게서, 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보가 중단되지는 않았습니까?

 

끊어질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구원계보를 이어가도록 목숨을 담보했던, 다말의 열심히 당신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계보를 이어가기 위해, 자기 백성과 자기 신들을 버렸던, 룻의 열정이 당신에게 있습니까?

 

우리에게 또 다른 도전이 있습니다.

 

행여나 구원의 물줄기가 나에게 도달하고 난 다음에 “다시는 흘러가지 않는 썩은 물로, 썩은 복음으로, 내 삶속에 고여 있지는 않느냐?”라고, 룻기는,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구원의 물줄기가 제대로 흘러가고 있느냐? 우리의 친구와 이웃과 동료들에게, 구원의 계보가 만들어져 가고 있느냐? 당신이 낳은 믿음의 자녀는 누구이며, 당신이 만든 당신의 믿음의 제자는 누구냐?”고, 룻기는 지금 나에게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가 만든 하나님의 구원의 계보를, 지금 당신에게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룻기의 저자는, 지금 주님의 제자요,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하나님나라 상속자가 된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주님의 비전을 가지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큰 도전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