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땅 끝을 향한 문이 활짝 열리다 (사도행전 10:28)

Johnangel 2022. 11. 24. 23:53

땅 끝을 향한 문이 활짝 열리다 (사도행전 10:28)

 

그동안 우리는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가 복음의 빛을 보고, 교회를 이루어 든든히 자리 잡고 부흥하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꿈이요, 비전인 인류 구원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계는 “땅끝”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은, 천국의 열쇠를 가진 베드로가 땅 끝을 향한 복음의 문을 활짝 여는 장입니다.

“땅 끝”으로 표현되는 이방지역은, 크기로 보나, 구원 받을 사람 수로 보나,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 합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훨씬 큽니다.

 

따라서 어찌 보면 행9:31절까지는, 작은 언덕 하나를 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 제일 큰 산이 눈앞에 있습니다.

2,000년 이상 계속될 “땅 끝”사역이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됩니다.

고넬료는 로마군대에 속한 백부장으로 이탈리아 출신입니다.

백부장은 우리나라로 치면, 장교와 같은 신분입니다.

 

사병은 인종과 혈통에 관계없이, 당시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지역마다,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을 뽑아 세웠지만, 장교는 반드시 로마 혈통을 가진 본토인이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명예와 형제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용기와 충성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전진하는 무서운 사람들로 결속된 집단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만과 긍지가 머리끝까지 찰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넬료는 바로 그런 신분을 가진 자였습니다.

이렇게 이방인 중의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고넬료가 바로 이방의 첫 번째 문이 되었습니다.

“땅 끝”사역의 첫 수해자, 첫 열매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의 기록 한편에는, 사울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이방을 위한 사도”로 선택받은 사울은, 안디옥과 다메섹, 예루살렘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유대인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아직 이방인들과는, 접촉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때까지 사울을 가만히 뒷자리에 두신 채, 이방을 위한 사도로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또한 사울이 앞으로 복음을 듣고 이방을 향해 나아갈 때, 그 길을 막아서는 방해물이 없도록, 천국 열쇠를 손에 쥔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전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16:1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베드로는 예수님께 천국의 열쇠를 받은 사람입니다.

열두 사도 중 수제자인 이유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특별한 역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질 때, 복음의 열쇠로 문을 열었습니다.

베드로의 첫 설교로 3,000명이 세례를 받고,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사마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립집사가 전도를 하긴 했지만, 성령이 임하셔서 사마리아교회와 예루살렘교회가 하나인 것을 입증한 사건이, 바로 베드로의 안수기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방에 대해 닫혀 있던 복음의 문을 여실 때도, 그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이방을 위한 사도는 사울이었지만, 이방의 문을 여는 역할은, 베드로에게 맡기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렇게 기막힌 역할을 했으므로, 정말 출세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어부 베드로가 배운 지식이 많았겠습니까?

히브리어나 제대로 읽고, 쓸 줄 알았겠습니까?

아마 기껏해야, 아람어 정도만 깨우쳤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베드로전.후서를 보면, 지적이기 보다는, 투박한 느낌이 들고, 글 솜씨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볼 때, 베드로는 사도바울과 비교가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런 베드로를 들어, 영광의 자리에 올려놓으신 것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잘나서 예수 믿고, 구원받고 복을 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은혜를 아예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베드로는, 아마도 문 앞자리에 앉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마다, 베드로를 보고 “저 사람처럼 아무 자격이 없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 오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사실 예루살렘과, 유대교회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유대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교회 사이에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비록 갈릴리가 유대의 변두리지역이라 사람들이 천대하긴 했지만, 혈통으로는 한 민족이요, 한 백성이기 때문에, 전도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문제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순수 혈통을 가진,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가르는, 높고 견고한 벽으로 작용했습니다.

 

2:12절을 읽겠습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얼마나 천대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방인을 메시아와 관계없는 사람, 언약의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유대인에게 이방인은, 소망이 없고, 형편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듯 전도자가 전도대상자를 아예 개처럼 취급했기 때문에, 제대로 전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벽을 허물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예수님의 명령인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얼른 나서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은, 그만큼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구원계획대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을 헐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13-16절을 읽겠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꿈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과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과 세산 만물을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관계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 고귀한 꿈을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우리의 죄를 갚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부르실 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베드로와 같은 무식한 사람도 불러 사용하셨고, 바울과 같은 “죄인 중의 죄인”도, 불러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기까지, 일하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5:17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그러므로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함이 없으면, 전쟁과 미움, 갈등과 고통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계획하신 일들이, 착착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할 때만 해도, 그 활동 범위가 얼마나 제한적이었습니까?

지도를 펴놓고 보면, 바울이 활동한 곳은 터키와 그리스, 그리고 로마였습니다.

결국 지중해 연안만 빙빙 돌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퍼져 나가고 있습니까?

아무리 세상의 죄악이 하나님을 대적해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엡1:10절에 보면, 바울이 기뻐하며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하시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 되게 하시는 이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베드로는 욥바에 와 있었습니다.

욥바는,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 요나 이야기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유대인인 요나를 불러,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때 요나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욥바에 와서, 배를 타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꿈,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온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는, 그 놀라운 꿈을 이루고자 하시는데, 선지자 요나는 “싫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요나처럼, 도망가지 않도록 특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는 중에,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보자기 안에는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한 부정한 짐승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그것을 잡아 먹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베드로 역시 처음에는,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은혜 받은 사람이요,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이지만, 그도 별 수 없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성령 받고, 은혜 받고, 남보다 특별한 체험이 있으면, 개인의 사고방식이나, 습관 같은 것도, 금방 바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고질적인 것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십자가를 보고, 부활을 보고, 성령 충만을 받고,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를 깨닫고, 사마리아에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 다 알고 있었지만, 그의 첫 반응은 “못 먹겠습니다.”라는 불순종이었습니다.

 

이때 “이놈”한번 하시면 될 텐데도,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세 번이나 보자기를 오르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가 알아들을 때까지, 세 번이나 “베드로야, 먹어라 내가 깨끗하다 하는 것을 네가 왜 속되다고 하느냐? 먹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야, 하나님의 뜻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속되다고 먹지 않은 그 짐승들은, 바로 이방인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잡아먹으라고 하신 뜻은, 이제는 “이방인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구약의 요나는 불순종했지만, 신약의 베드로는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셨는데, 스스로 속되다 구별하고, 은근히 마음을 닫아버리는 대상이 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나 부자나 똑같이, 관심을 표현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좀 지위가 있고, 부자라고 하면, 한 번이라도 더 관심이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관심을 덜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이, 그런 짓을 하다가 결국 주님께 뭐라고 야단맞습니까?

“너희들이 천국 문에 버티고 서서, 들어올 사람도 못 들어오게 한다.”

즉, 하나님은 다 들어오라고 하시는데,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이, 문 앞을 막아서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려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과, 못 지키는 사람을 가려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베드로는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일로 베드로는, 예루살렘교회에 돌아와 유대인 동료들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유대인이면서 이방인의 집에 가서 함께 먹고, 그들 집에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비난받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일이 해명하지 않았습니다.

수석 사도로서의, 명예나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기보다, 하나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우리도 이방인이었습니다.

무할례당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아무 기업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아름다운 복음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온 우주를 하나 되게 하시려는, 그 뜻이 이루어질 때, 영원한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영원한 행복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그 행복과 그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통하여 일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는 선교사 보내는 선교사가 되어, 매년 설명절 때마다 외국인들을 가슴에 품고, 생명의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땅 끝을 향해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우리가 전한 복음으로, 놀라운 생명의 열매가 맺혀지리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