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주 안에서 하나 된 증거 (고린도전서 11:17~34)

Johnangel 2023. 4. 8. 01:54

주 안에서 하나 된 증거 (고린도전서 11:17~34)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은 “주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중심도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다스리시고 인도하셔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라는 화려한 상업도시를 배경으로 세워졌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은사사용과 돈과 쾌락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흔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예배는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들의 예배가 성도들의 영적성장에 전혀 유익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를 책망합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 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여러분,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가 되는 모임으로 변질되었을까요?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모임의 중심이 아니라 세상적으로 유력하고 돈 있는 사람들이 모임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영적으로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18절에 보면 “사람을 중심으로 파당을 짓고 분쟁”을 일삼았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우리 성도들을 이간질하고 사이를 갈라지도록 유혹합니다.

그래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살맛나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공동체의 가족들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가족들로 인하여 서로 상처받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분쟁의 소식을 들은 사도바울은 마음에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기도하며 생각한 후, 고린도교회가 영적질서를 회복하고 화평한 교회, 주님을 중심으로 균형 잡힌 교회, 성숙한 교회로 쓰임 받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성찬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와 교훈을 다시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찬의 의미를 전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소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이 성찬을 통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주심으로 쓸모없는 인생을 쓸모 있는 인생으로, 멸망으로 달려가는 인생이 천국의 소망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사랑과 은혜를 다시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성찬의 은혜에 참여하는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첫째, 물질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주님은 성찬이라는 거룩한 만찬을 허락하셔서 떡과 포도주를 먹음으로 주님을 경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성찬에 참여함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주님과 영적인 관계를 맺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둘째, 개인적인 존재이면서 공동체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구원받은 것뿐만 아니라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공동체 생활에서는 윤리가 필요합니다.

공동체 사회에서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님 앞에 홀로 서는 자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윤리적인 탁월성을 소유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사회가 밝아지고, 그들과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사회, 더 나아가 신앙 안에서 함께 잘 사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수직적인 관계인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올바로 설정될 때, 수평적인 관계인 나와 이웃의 관계가 올바로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고린도교회는 수직적인 주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자 성도들과의 수평적 관계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찬의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고 믿음으로 성찬을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해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까?

 

1.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24-25절을 읽겠습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주님은 성찬을 행하시면서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나를 기념하라”는 것은 “나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을 오늘에 재현하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기억하는 것은 “내 마음의 왕좌에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다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성찬식에 참여할 때 주님을 기억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요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죄 값을 치루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주님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과 용납을 기억했을 때 아버지 품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듯이, 우리는 주님의 무한하고 조건 없으신 사랑, 나를 끝까지 추적하고 붙잡아주시는 사랑을 기억할 때 주님께 돌이킬 수 있습니다. 성찬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 성도의 본질을 회복하는 첩경입니다.

 

3. 믿음의 교제를 새롭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20-21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우리는 나이와 성별을 초월해서 믿음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경제적인 차이 때문에 차별과 파당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요한 자들은 자기들 끼리 넉넉히 먹고 마심으로, 가난한 자들은 성찬에 참여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교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경계하고 책망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공동체란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업과 성별과 학력과 경험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 차이로 인해 서로 상처주거나 소외받지 않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갈6:10절에서 사도바울은 “선한 일을 하되 더욱 더 믿음의 가정에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봉사를 강조해야 하지만, 먼저 우리 안에 성도의 사랑이 넘치고 흘러서 이웃의 마음을 적셔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나누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4. 감사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그렇습니다.

주님은 성찬을 행하시면서 축사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생활을 회복해야 합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속의 불평과 불만을 몰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가족과 교회와 이 나라에 대한 감사를 회복한다면, 더욱 알찬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성찬은 행하되 그 의미는 적용하지 못함으로 파당과 분쟁이 있는 무질서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성찬의 의미를 오늘에 되새김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는 건강한 교회, 균형있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성도의 믿음의 교제가 더욱 풍성한 성숙한 교회가 되게 합시다.

영적으로 혼탁한 이 시대에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우리의 삶과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