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벼랑 끝에서 만난 하나님 (고린도후서 1:8-11)

Johnangel 2023. 4. 14. 20:21

벼랑 끝에서 만난 하나님 (고린도후서 1:8-11)

 

우리 인간의 절망은 환경이나 상황자체보다도, 그 환경이나 상황을 넘어설 수 없는 마음의 두려움에서 시작됩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은 정말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럴 수 있을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8절에서 바울 사도는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고 묘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건인지는 정확하게 우리가 분명하게 알 길이 없지만 바울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전도하다가 핍박을 받고 감옥에 투옥당하여 언제 사자의 밥이 될지 모르는 등의 그 어떤 상황적인 고난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바울에게는 더 이상 살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살 소망이 없는 절망 중에서도 바울은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절망을 만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묵상의 결론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단합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절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라는 우상을 내려놓게 하시는 하나님의 특단의 교육비책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녀로써 인생을 살면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보다, 나 자신만을 더 붙들고 사는 나를 깨트리시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교육의 마당이 바로 환난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 “하나님만”이라는 바울의 표현을 주목해야합니다.

물론 과거에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믿음의 삶을 산다고 자부하고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바울 사도는 자기도 믿고 하나님도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 사도는 절망을 경험하면서, 이제는 “하나님만 의지하자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도 하나님도의 신앙”에서, 이제는 “하나님만의 전적으로 신앙으로 성숙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촬스 콜슨(Charles Colson)은 미국 닉슨 대통령시절 특별 보좌관으로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방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등도 밟고 지나갈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서 닉슨 대통령은 대통력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콜슨은 감옥으로 갔습니다.

더 이상 붙들 수 있는 권력도 자신도 없어진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성도들이 넣어준 성경을 읽고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오며 “거듭남”이라는 불멸의 베스트셀러를 저술하고, 감옥의 죄수들을 전도하기 위한 전도대원을 만들어 수많은 수감자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 노벨상인 템플톤 상을 수상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벼랑 끝에서 그를 만나주신 하나님이 그에게 새희망의 근거, 새인생의 근거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2. 하나님 체험입니다.

 

여기 바울 사도를 절망에서 일으킨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과거의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이라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지난날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셨던 일을 기억해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하나님이 지난날 나를 도우셨다면, 오늘 이 순간도 하나님은 나를 도우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되는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이 되려면, 이제 그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보통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말씀을 로고스와 레마로 구별합니다.

때로는 중복적인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로고스가 기록된 말씀이라면, 레마는 성취되는 말씀, 체험된 말씀을 의미합니다.

 

한번은 신학대학원 졸업식 사은회에서 한 학생이 성경을 손에 들고 나와서 대표 인사를 하며 “교수님들 아무 걱정 마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고 살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졸업식에서 설교를 하시던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제군들이 말씀을 붙들고 살겠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결심이네. 그러나 제군들이 진정한 승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제군들이 말씀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제군들을 붙들어 주는 체험이 필요하네. 그때 제군들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일세”

그렇습니다.

지난날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으로 고난에서 벗어난 체험이 있는 사람은 결코 오늘의 환난이나 고난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주님이, 어제 내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한 내 기도를 응답하시고, 오늘도 약속의 말씀으로 지켜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체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체험은 항상 말씀의 근거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동력성은 말씀체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절망을 이기는 희망의 근거 그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도응답입니다.

 

절망에서 바울이 주님을 구체적으로 체험한 것은 바로 기도응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응답을 경험할 때까지 우리의 신앙은 아직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은 울릴 때까지는 아직 종이 아닙니다.

노래는 노래할 때까지는 아직 노래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할 때까지는 아직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기도응답을 경험할 때까지는 아직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응답이 나의 믿음을 체험하게 하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일어서면서, 이 편지를 읽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중보기도를 부탁합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함이라”

물론 바울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전심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중보기도를 통한 기도응답의 확신에 찬 부탁으로 자기를 위해 기도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진정 감사하고 진정 희망을 나누게 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전도를 위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기도하여 주님이 소원하시는 세계비전의 같은 열매를 맺자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기도응답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그 희망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게 된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주택자들에게 집을 지어 공급하는 “해비타트 운동”에 대하여 들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지미 카터 대통령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 운동의 봉사자일 뿐이지, 이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밀라드 훌러(Millard Fuller)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밀라드 훌러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한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클라렌스 조던(Clarence Jordon)목사입니다.

 

그는 본래 조지아대학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농사에 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가난한 흑인들의 절망적인 삶을 바라보고, 또한 흑백 인종의 차별이 가져온 미국 남부의 갈등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신학밖에 없다고 느껴 그는 신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는 공부를 잘해서 최단 시일에 신약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는 졸업 후 성경번역을 하고, 여러 우수한 신학서적을 집필합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차별 받고, 절망하는 흑인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사로잡습니다.

그는 기도하던 중 성령님을 통해 사도행전에 나타난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시작하라”는 말씀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는 교수직 초청도, 큰 교회의 담임목사 초청도 사양하고, 조지아주 시골에 들어가 백인과 흑인이 어우러져 사는 코이노니아(교제)공동체를 시작합니다.

 

1942년부터 1969년까지 그는 주변에 가난하고 버림받은 흑인들을 데려다가 뜻을 같이하는 백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섬기게 하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손을 잡고, 함께 집을 짓고, 함께 농촌을 개간하게 합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김용기 장로님이 가나안 농군학교를 시작하신 것과도 유사한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흑백 인종의 갈등이 하루도 신문에 보도 안 될 날이 거의 없는 혼탁한 때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코이노니아(교제)공동체에서는 흑인과 백인들의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은 기적 같은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1965년 몇 시간 이 공동체를 방문할 목적으로 이곳을 찾아왔던 청년 밀라드 풀러(Millard Fuller)는 여기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며칠을 그곳에서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전 재산을 정리하여 1968년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 됩니다.

그가 거기서 담당한 사역이 집짓기 사역이었고, 이것이 바로 후일 해비타트 운동이 된 것입니다.

 

1969, 10, 29일 조던 목사는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코이노니아 공동체 식구들이 모인 가운데 조던 목사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진행되었고, 순서를 따라 마지막 하관식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공동체 식구들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이 순간에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 흑인 아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무슨 노래인줄 아십니까?

“Happy birthday to U, Happy Birthday Dear 조던 목사님”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맞아. 오늘은 조던 목사님이 하늘에서 다시 태어나시는 날이야”

이때부터 사람들은 슬픔을 멈추고, 이 장례식에서 생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슬픔의 자리는 순간 놀라운 희망의 축제로 바뀌었습니다.

밀라드 풀러는 그가 저술한 책에 이 자리를 “조던 목사님의 그날 장례식의 광경은 바로 그의 일생의 삶의 상징이었다. 그는 수많은 절망한 이웃들에게 희망의 생일을 선물하였다”고 이렇게 회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