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주님을 감동시킨 백부장의 믿음 (마태복음 8:5-13)

Johnangel 2023. 4. 16. 23:18

주님을 감동시킨 백부장의 믿음 (마태복음 8:5-13)

 

한 저널리스트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르쳐 무관심의 시대, 무책임의 시대, 무감동의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일을 빼놓고는, 관심가질 일도 없고, 책임질 일도 없고, 감동 받을 일도 없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파괴와 해체로 상징되는 오늘의 포스트 모던 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현대인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감동체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우리 예수님이 이토록 감동을 받으셨습니까?

 

1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감동을 먹으신 예수님의 느낌이 여러분에게도 전달되어 오십니까?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을 감동시킨 이 사람의 믿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1. 자신을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자신을 초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초월해야 이웃들이 우리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도무지 이웃들에 대하여 손톱만큼의 관심도 갖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만 함몰되어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오늘 본문에 소개된 백부장은 지금 하인의 문제로 예수님께 나아와 그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당시의 백부장은 군인 100명을 거느린 로마 군대의 장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자신의 노예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노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주석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주인은 종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었고, 노예들은 물건이나 짐승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였으며, 짐승과 노예의 유일한 차이는 노예는 말이 통한다는 것 뿐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 이런 노예를 위해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그냥 도움을 구한 것이 아니라,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몹시 괴로워하나이다”고 그의 병세를 묘사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여러분은 최근 이웃나라 일본에 불어 닥친 재앙으로 고통 받는 그들을 위해 진실한 연민을 가지고 중보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도울까?”하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복음서에 보면 마지막 심판의 광경을 묘사한 대목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플 때 네가 나를 돌아본 일이 있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아니 주님이 언제 아프셨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의 대답을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건강한 자아상은 내가 나 자신에게 인생의 초점을 두고 살 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초월하여 고통 받는 이웃들을 돌아보고 섬길 때 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한번은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순회할 때의 일입니다.

한 여인이 찾아와 자기는 온갖 상담을 다 받았지만 도움이 안 되었고 “이제는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때 테레사는 조용히 그녀에게 “기왕에 죽을 결심을 하셨다면 자살을 연기하고 내가 일하는 인도에 와서 나를 한 달만 도와주고 그 다음에 죽으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대로 했고, 한 달 후에 테레사가 이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서는 환한 빛이 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웃으며 그녀에게 “언제 돌아가시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죽다니요? 전에 나만을 생각하던 시절 나는 나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웃을 돌아보면서 내가 살아났습니다”

여러분,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살고 싶으시면 나보다 더 고통 받고, 나 보다 더 외로워하는 이웃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시고, 그들을 위해 중보해 보시고, 그들을 섬겨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기쁨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섬김,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백부장의 아름다운 믿음에 감동을 느끼면서 계속 제 마음에 떠오른 생각은 “예수님이 얼마나 이런 분을 좋아하실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은 자신을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2. 공간을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마침내 백부장에게 감동을 받으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때 백부장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8절을 읽겠습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그렇습니다.

비록 그의 하인이 아파 누워 있는 자기 집과 지금 예수님을 만난 그곳 사이에 공간적인 거리가 있어도 예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공간을 혹은 지역을 초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놀라운 문명의 발달로 떨어져 있는 가족들과 전화로 이메일로 끊임없이 통신하며 살아가고, 거리를 초월하여 나라와 나라사이에, 도시와 도시사이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혹은 유학차 해외로 사랑하는 자녀들을 떠나보내며, 끊임없이 안타까워하며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도 우리는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 옛날 벌써 공간을 초월하는 믿음의 사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무엇으로 그가 이 공간을 초월할 수 있었습니까?

말씀과 기도의 능력이었습니다.

주님께 기도하면 어디서나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공간을 초월하시어 역사하심을 믿었습니다.

또한 그가 한번 말씀하시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일하시던 그분의 말씀은 공간을 초월하시어 역사하심을 믿은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누군가와 떨어져 있어서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현실 때문에 곤혹스러워 분은 안 계십니까?

걱정할 시간에 엎드리어 중보의 기도를 하십시오.

그리고 이 백부장처럼 제 남편에게, 제 아내에게, 저의 자녀에게 “다만 말씀 하옵소서”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에 장에 임하도록 선포하십시오.

공간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주님의 기적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3. 민족을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백부장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로마 군대 소속이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는 로마인이었거나 아니면 로마의 용병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족이 다르다”는 선입견을 깨트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장교였기 더욱 이런 결단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나 사회적 신분이 높을수록 사람은 자신의 신분을 의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분보다 자기가 아끼는 하인이 치유받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에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0-11절에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세계선교의 비전이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한국 사람으로서 예수를 믿고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게 된 것은 이 백부장의 믿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은 이 백부장 같은 누군가가 자기 민족만 생각하지 않고 민족을 넘어서는 믿음의 여행을 결심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고 천국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으로부터 120년전 미국의 성도들이 혹은 영국이나 카나다 그리고 호주의 성도들이 우리나라에도 아직 봉사할 일과 전도 할일이 많은데 저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까지 관심을 가질 이유가 무엇이냐고 생각했더라면 우리가 복음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쯤 우리가 예수를 믿지 못하고 살고 있을 자신의 모습이 연상이나 되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번 겨울 우리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백부장의 믿음을 갖고 제17차 단기선교로 나아가 봉사하는 일에 헌신하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설날 휴가 대신 단기선교에 참여해 주셨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하시는 경우도 적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도 좀 놀라시지 않으셨을까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기쁘셔서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내가 한 교회가 이런 일을 한 것을 보지 못했노라”

“나는 지금까지 이만한 공동체의 헌신을 보지 못하였노라” 저는 지금까지 감동의 역사를 만들어온 고현교회 모든 성도들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가진 부족함이 많고, 약점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 교회가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교회에게 백부장의 믿음을 가진 많은 아름다운 평신도 리더십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안에 아름다운 일을 이루신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한 이런 감동의 사역이 계속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