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기도의 갈망 (막1:35-39)

Johnangel 2023. 4. 15. 19:53

기도의 갈망 (막1:35-39)

한 사람이 예수를 참으로 믿고 거듭나게 되면 그의 인생의 여러 영역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 현저한 변화의 하나는 새로운 갈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기도의 갈망은 가장 두드러진 것입니다.
기도의 갈망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눅11:1절에 보면 어느 날 예수께서 기도하고 일어서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기도의 갈증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기도하고 일어서시는 예수의 모습에서 그들은 기도의 영광을 보고 기도의 목마름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때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에게 나아와 “선생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호소합니다.
누가 복음에 의하면 이런 제자들의 간청에 예수님께서 기쁨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주기도”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마가복음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초기의 그 어느 날의 예수님의 기도생활의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기도의 갈망을 안고 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실로 하루하루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인생을 살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우리의 기도의 갈망을 실현할 수 있는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의 갈망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요?

1. 기도 갈망의 장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기도의 갈망이 있다고 해서 다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기도를 하긴 해야 할 터인데 이렇게 소원은 하면서도 실상은 기도없는 일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기도하는 한국 교회”라는 명성과는 다르게 한국교회 성도들의 하루평균 기도하는 시간이 일반 평신도들은 5분-10분, 제직들은 10분-15분, 성직자들은 20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왜 우리가 기도를 갈망하면서도 실제로는 기도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기도의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갈망의 가장 보편적인 장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쁨과 피곤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빠서 그리고 피곤해서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이런 핑계를 못하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유난히도 바쁘고 피곤한 하루를 보내신 예수님이 그 이튿날 그 바쁘고 피곤하심을 기도로 극복하고 계시는 모범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빠서 더욱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35절에 보시면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아직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그 전날 하루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지나셨는가를 이해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막1:21절부터 보면 그 전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 아침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예배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배 중 귀신들린 자가 있어 대적하고 소리지르며 예배를 방해하자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좇아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배 후 그는 회당에서 나와서 시몬 베드로의 집에 쉼을 위해 가셨는데, 거기서 다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를 기도로 고치셨습니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는데 예수의 치유의 소문이 퍼지자 온 동네 병자들이 그 집 앞에 몰려들었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일일이 저녁 늦게까지 고치시면서 밤이 저물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 하루였을까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이튿날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날의 바쁨과 피곤을 오히려 기도로 극복하신 것입니다.

1930년대 나치 독일의 핍박을 피하여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미국으로 망명하여 프린스톤 대학 캠퍼스에서 걸을 수 있는 거리에 집을 장만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에미(Emmy)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소녀가 아인슈타인 박사의 집 문을 노크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왜 왔느냐?”고 묻자 어린소녀는 “수학 숙제를 풀다가 너무 어려워 못하겠는데 유명한 수학박사님이 여기 사신다는 말을 듣고 도움을 받으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소녀를 정중하게 집안에 들어오게 하고 도움을 주면서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에미의 어머니가 쿡키를 구워 가지고 방문하여 “바쁘신 분을 제 딸이 괴롭혀드려 죄송하다”고 말하자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작은 문제나 큰 문제나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기쁨입니다. 그리고 제게는 프린스톤의 교수들이나 댁의 딸 에미나 똑같은 손님이구요” 여러분, 아인슈타인도 이렇게 어린소녀를 도울 수 있었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번거롭게 생각하실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바쁨을 핑계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만 있다면 그분은 기도를 들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작은 문제나 큰 문제나 우리를 도우시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그분이 바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바쁨을 핑계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바쁨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주님께 기도로 나아오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 갈망의 실현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기도의 갈망이 구체적인 기도로 실현되려면 구체적인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에 필요한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느 때든지, 어느 곳에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집중적인 대면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나 부적절한 사건에 의해 방해 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과 조용한 장소를 확보하는 것은 기도를 실현하는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한번으로 끝나는 충동적인 기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는 새벽기도의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 새벽에 교회에 나와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루를 시작한다면 더 없이 좋을 것입니다.
직장 출근이나 신체적인 조건으로 불가능하다면 오전 조금 늦게 집이나 직장에서 경건의 시간을 가지실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도 유사한 계획으로 기도를 준비하고 실천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여러분, 35절에 보면 그가 선택하신 시간은 언제였습니까?
“새벽 아직도 밝기 전” 아침이 깨어나지 않은 조용한 시각이었습니다.
장소는 어디였습니까?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눅22:39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장소에서 기도하신 것은 거의 습관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좋은 습관을 갖는 것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가장 중요한 비밀입니다.
예배가 습관이 되어야 하듯이 기도가 습관이 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매일 규칙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대화할 수 있는 여러분만의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선택하십시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기도의 갈망을 실현하는 시작입니다.

3. 기도 갈망의 결과를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 갈망이 반드시 현실화되려면 우리는 먼저 기도의 삶이 가져오는 현실적 결과를 예측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어느 날의 새벽기도가 구체적으로 그 날의 일정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새벽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어제 예수께서 가버나움 마을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결과로 오늘은 더 많은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36-37절을 읽겠습니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바로 이때의 예수님의 반응을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38절의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견을 따라 가버나움에 머무시기보다 그날은 다른 계획이 있음을 명확히 하신 것입니다.
“가버나움뿐 아니라 복음을 들어야 할 다른 마을들에도 가서 전도해야한다”고 말씀하신 후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지역에 전도함으로 복음의 역사가 총체적으로 전파되어야 한다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날의 새로운 비전과 계획이 그날 새벽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기도의 대화에서 결정되었음을 우리는 추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그날의 하나님의 뜻, 행동의 방향, 계획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바람직한 기도의 영향력인지 모릅니다. 고든 맥도날드(Gordon Mcdonald)는 그가 쓴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이라는 책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는 한 유형을 가르쳐 “충동에 이끌리는 삶”이라고 했고, 또 다른 유형을 “소명에 이끌리는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오늘 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냥 하루하루를 충동적으로 본능적으로 그리고 감정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고 상처받고 상처주고 인생을 상처뿐인 전쟁터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명에 이끌리는 삶은 다른 차원의 삶입니다.
그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는 여론을 경청하지만 여론에 의해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비전을 확인한 후 자기가 마땅히 가야할 길을 묵묵히 걷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갈망되지 않으십니까?

개혁자 말틴 루터는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나는 요즈음 더 바빠진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할 필요를 느낀다”
이것은 바빠지기 때문에 기도할 시간을 낼 수가 없다고 핑계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도 기도의 필요가 있었다면, 연약한 인생으로 살아가는 자와 여러분은 얼마나 더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기도의 목마름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이제 바쁘다는 핑계를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계획하십시오.
오늘부터 당신의 기도로 하늘의 문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당장 이 땅에서는 당신을 위한 새역사가 시작될 것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