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한 가난한 과부의 헌신 (마가복음 12:41-44)

Johnangel 2023. 4. 21. 16:00

한 가난한 과부의 헌신 (마가복음 12:41-44)

 

제가 오늘은 돈 얘기를 할려고 합니다.

“교회 가니까 돈 얘기만 하더라”고 말하며 돈 소리만 나오면 신경이 날카 로와지시는 분이 있습니다만 이 시간 마음 놓으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래 전에 종교개혁자인 캘빈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는 돈에 대해서 너무 많은 얘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에 대하여 바른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요한 웨슬레 선생도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회개를 신용할 수가 없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아 그가 정말 새 사람이 되었다면, 저는 먼저 현저한 변화를 가져와야 할 그 사람의 삶의 영역 중에 하나가 돈 씀씀이의 변화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 헌금에 반영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회심, 그 사람의 구원, 그 사람의 신앙, 그 사람의 변화를 신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금은 헌신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돈을 소모하는 모습을 보면 거기서 그 사람의 인생관, 그 사람의 가치관, 그 사람의 세계관을 뚜렷하게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지극히 평범한 한 여인이지만,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헌신의 스토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42절에 보면 본문에 나타난 주인공의 정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과부는 가난했습니다.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성경은 그녀가 과부였다고 말합니다. 외로운 여자였습니다. 정서적 고통을 안고 있었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헌신의 귀감이 되었던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날 주님은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시다가 여인들이 올 수 있었던 이방인의 뜰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미문이라는 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느 곳에 걸터앉아서 성전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헌금을 드리고 그 안에까지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41절에 보면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하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그냥 그 헌금함에 헌금내고 들어가는 사람들을 어쩌다 한번 슬쩍 보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지켜보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예수님이 여러분이 헌금하는 모습들을 보고 계셨더라면 아마 헌금하는 모습이나 표정이 좀 달라지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지켜보고 계시다가 특별히 예수님의 시선은 한 여인에게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슴은 아마 뛰고 계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여인에게서 예수님은 그 시대의 참된 헌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헌신의 한 샘플을 발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여인이 보여준 그 헌신의 본질을 통해 참된 헌신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이 보여준 참된 헌금의 정신, 도대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1. 참된 헌금은 우리의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만을 의식한 결과이여야한다라는 사실입니다.

4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아 넣는데” 당시 이 헌금함은 놋쇠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헌금함을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흔히 나팔궤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화폐를 떨어뜨리는 헌금함의 입구가 나팔처럼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헌금은 지폐가 아니라 동전이었기 때문에 놋쇠로 만든 헌금함에 헌금을 집어넣으면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많이 넣는 것과 적게 넣는 것을 돈이 떨어지는 소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구별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치가 높은 화폐를 집어넣으면 쨍그렁하고서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집니다.

그러나 가치가 낮은 화폐를 내면 그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쟁하고 조금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부자들이 다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떤 부자는 헌금의 동기가 자기 과시의 동기로 아주 가치가 높은 화폐를 떨어트리면서 쨍그렁 소리가 나면 어깨에 힘을 주며 “내가 돈을 많이 냈다. 나 쳐다보는 사람 없나?”하고 한번 확인한 후에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아마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집어넣고 성전에 들어간 다음에 42절에 보면 한 가난한 과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42절을 읽겠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그 당시 로마사람들의 화폐단위 가운데 최소단위가 고트란트입니다.

그리고 유대사람들의 화폐단위가치 가운데 제일 싸구려가 렙돈이였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0원 정도입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렙돈이라는 말의 뜻 그 자체가 얇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렙돈을 헌금함에 집어넣으면 퉁 소리도 별로 안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 헌금을 내는지 알 수 있었던 그 놋쇠 헌금함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이 여인은 이 장면에 와서 굉장히 주눅이 들고 또 자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을 충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나를 보지 않을까? 하는 이 순간 자기를 의식하면서 상당히 부끄러워질 수도 있었던 이런 결정적인 이런 순간에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 나 같으면 아예 창피하여 헌금을 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말씀을 묵상하며 이 순간 이 장면 속에서 이 여인이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양이 얼마나 많으냐 적으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최선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한 이 여인의 당당한 태도가 이 헌금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원인이라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가 드리는 헌금의 그 대상이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드림이라고 믿으십니까? 정말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것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 그분의 사랑, 그분의 도우심, 그분의 인도하심이 오늘 나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나는 그 은혜에 빚지고 있다, 그 은혜로 구원받고, 그 은혜로 지금 여기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다만 그분의 은혜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몫을 내가 주께 드린다”

그렇습니다.

저는 참된 헌금은 내 삶의 주인 되신 살아계신 하나님, 그 분만을 의식한 결정이 바로 헌금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2. 참된 헌금은 희생의 정신이 깃들여져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을 가르켜서 그 제물을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종종 성도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님, 헌금을 할 때, 어디에 가이드 라인을 두고 해야 옳습니까?

저는 그럴 때마다 두 가지 얘기를 합니다.

하나는,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우리가 헌금의 액수를 결정하지 못할 때 “이 정도라면 내가 희생이 된다”라고 생각되면 좋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헌금의 정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 편에서의 희 생을 전제로 하는 어떤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저는 이 여인이 가진 두 렙돈 중에서 한 렙돈만 드려도 하나님이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두 개의 렙돈은 그녀에게 있어서 생활비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개의 렙돈을 드렸으면, 그녀의 생활비의 절반을 드린 것으로서 그 정도만 해도 이 여인의 경우 굉장한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경우에는 하나의 렙돈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두 개의 렙돈을 다 드렸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향한 이 여인의 사랑이었고, 온전한 희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선배들과 믿음의 사람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여러분 다윗 왕을 기억하십니까?

다윗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보다 존경했던 왕입니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에게 추적당하고 쫓겨다니면서 많은 생명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아리우나라는 사람의 소유인 예루살렘의 높은 언덕에 있는 타작마당에 올라가서 보니까 예루살렘의 시내의 전경이 한 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아주 전망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기분도 좋아졌고,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전망 좋은 이곳에서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싶다”

그러나 다윗 왕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으로 충만하고, 주님을 예배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고, 그런 감동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하고 싶었지만 제물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그 땅의 주인 아리우나가 “소와 양들을 가지고 와서 여기에 제물이 있습니다. 왕이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때 다윗이 삼하24: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다시 말해서 “나는 공짜로 주는 그것으로 바치지 않겠다. 제물에는 내 정성이 있어야 되고, 내 땀흘림이 있어야 되고, 내 희생이 있어야 한다. 내가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왕의 희생정신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이 바로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는 그 자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름다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준 헌금정신의 소중한 전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통해서 그대로 계승됩니다.

 

신약시대도 마찬가집니다.

고후8:2절 보면 소위 마케도니아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드렸던 헌 금의 아름다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도들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 자신도 환란 속에 있었고, 그들 자신도 많은 시련을 겪고 있었고, 그들 자신의 경제적인 형편도 극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헌금을 합니다.

그리고 환란과 시련과 극한 가난 중에서도 그들은 풍성한 헌금을 넘치도록 하였다고 했고, 고후8:3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그들의 헌금의 태도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참된 헌금이란 “바로 희생이 들어있는 정신이다”라는 모본을 발견합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이러한 헌신의 모본을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3. 참된 헌금이라는 것은 전체를 드릴 수 있는 정신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헌금은 다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에 어떤 분은 쇼크를 받아 “최창훈 목사가 교주가 되어 전 재산을 다바치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긴장이 되어 저를 안쳐다보고 다른데 쳐다볼 수도 있습니다.

헌금정신은 전체를 드리는 정신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여러분, 정신이라는 말에 위로가 되죠?

제가 십일조에 대해서 강조할 때 늘 이야기합니다만 우리 한국교회 교인들이 십일조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오해는 이런 것입니다.

십분의 일을 왜 드리는가?

십분의 일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십분의 일만 주님의 것입니까?

십분의 십 전체가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십분의 일을 드립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그 능력과 건강과 또 노력을 가지고 내가 이것을 벌었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내 존재의 원천, 내 삶의 이유, 내가 여기 서 있을 수가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전체가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구체적으로 내가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그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한 십일조를 드렸다면 십분의 구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합니다.

십분의 구도 마땅히 그분의 것이라면 나에게 맡겨 주신 것에 불과하고, 그 분이 나의 주님이시라면 그분의 뜻에 맞도록 내가 십분의 구도 관리하는 이것이 저는 온전한 십일조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요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가장 소중한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부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외아들을 가지고 있는 부모에 대해서 외아들은 그의 전체요, 생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 전체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주님의 사랑, 그것은 전체를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의 피 흘리심, 그의 내어주심, 그의 몸이, 그의 100%가 십자가에서 깨지고 피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여러분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100%의 사랑에 빚지고 있는 자, 그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정당한 응답은 어떤 응답이어야 할까요. 100%를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께 얼마를 드리든지, 100원을 드리든, 1000원을 드리든, 10000원을 드리든, 드릴 때의 우리의 심정이 “하나님 이것은 나의 전체를 주님께 드리는 상징이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의 시티 스터드라는 학생이 하나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톱을 달리는 학생이었고, 크리캣이라는 운동선수였습니다.

그 운동으로서 그는 영국 전체의 골드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보장된 출세의 길이 그 앞에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캠퍼스집회에 참석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는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가기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명예와 권력과 그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가 선교의 길에 나서자 누군가가 그를 찾아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친 희생이 아닌가?”

이때 시티 스터드는 모든 시대를 사는 크리스챤 지성인들에게 충격적인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헌신은 그 이하로 만족해서도 안되고 만족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비록 저는 돈 문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은 헌신의 중요한 한 척도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한 마디로 인생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 분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맡겨주신 생명의 길이 인생이다”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삶의 길이 바로 우리의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시간도, 단 한 시간도 낭비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진지하게 삶을 사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내 육체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내 몸은 피 값으로 산 것이니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다.

믿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내 재능 내 재주 하나님이 주셨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드린다. 이것이 헌신의 정신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지금쯤 이 여인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엇보다도 오늘 아침 천국에 있는 이 가난한 과부는 아마 최창훈 목사가 자기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너무너무 좋아할 것입니다.

“아 내 얘기 하고 있구나. 내가 주님 앞에 그날 부끄러워하면서 수줍어하면서도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람의 의식과 시선을 넘어서서 드렸던 그 보잘것없던 두 개의 렙돈을 저 고현교회에서 계속되고 있구나”

 

그런데 여러분, 저만 설교 했을까요?

얼마나 많은 목사님들이 오늘의 이 본문을 가지고 이 여인의 헌신을 주제로 설교 했을까요?

바로 이 여인의 헌신의 메시지를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헌신을 배웠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께 헌신했을까요?

이 설교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일생을 주 앞에 바치고 헌신의 길을 떠나갔고, 어떤 교회는 바로 이 메세지 때문에 예배당 건축을 할 수가 있었고, 이 헌신 때문에 자선 사업들이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면 이 여인의 두 개의 렙돈의 헌신은 얼마나 위대하게 쓰임 받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두 개의 렙돈, 이것은 결코 작은 헌신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의 두 개의 렙돈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지금 어떻게 주님 앞에서 사용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