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하나님 (고린도후서 1:3-11)
우리 인간의 절망은 환경이나 상황자체보다도, 그 환경이나 상황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두려움을 느낄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은 정말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럴 수 있을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그렇습니다.
어떤 사건인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길이 없지만 바울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전도하다가 핍박을 받고 감옥에 투옥당하여 언제 사자의 밥이 될지 모르는 등의 그 어떤 상황적인 고난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바울에게는 더 이상 살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살 소망이 없는 절망 중에서도 바울은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절망을 만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십니다.
바울 사도는 이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묵상의 결론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단합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절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라는 우상을 내려놓게 하시는 하나님의 특단의 교육비책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녀로써 인생을 살면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보다, 나 자신만을 더 붙들고 사는 나를 깨트리시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교육의 마당이 바로 환난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 “하나님만”이라는 바울 사도의 표현을 주목해야합니다.
물론 과거에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산다고 자부하고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바울은 자기도 믿고, 하나님도 믿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절망을 경험하면서, 이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도 믿고 하나님도 믿는 신앙”에서, 이제는 “하나님만의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으로 성숙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촬스 콜슨(Charles Colson)이란 사람을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촬스 콜슨은 미국 닉슨 대통령시절 특별 보좌관으로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방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등도 밟고 지나갈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서 닉슨 대통령은 대통력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콜슨은 감옥으로 갔습니다.
더 이상 붙들 수 있는 권력도 자신도 없어진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크리스챤들이 넣어준 성경을 읽고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오며 “거듭남”이라는 불멸의 베스트셀러를 저술하고, 감옥의 죄수들을 전도하기 위한 전도대원을 만들어 수많은 수감자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 노벨상인 템플톤 상을 수상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벼랑 끝에서 그를 만나주신 하나님이 그에게 새 희망의 근거, 새 인생의 근거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자기를 위해 사는 삶으로서 행복해 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으로써만 행복해 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형벌로부터 구원해 주셨고, 우리에게 죄사함의 용서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구원을 주시고 풍성한 삶을 살도록 풍성한 진리와 은혜를 자원으로 주십니다.
지금 진리의 빛이 우리 앞에 있고, 은혜의 샘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전2:14절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주님만 신뢰하고, 망가진 것은 고치고, 왜곡된 것은 바로 잡으며, 다시 한번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여 기도응답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 체험입니다.
여기 바울 사도를 절망에서 일으킨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과거의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이라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지난날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셨던 일을 기억해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하나님이 지난날 나를 도우셨다면, 오늘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도우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되는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이 되려면, 이제 그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보통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말씀을 로고스와 레마로 구별합니다.
때로는 중복적인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신학적으로 로고스가 기록된 말씀이라면, 레마는 성취되는 말씀, 체험된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지난날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으로 고난에서 벗어난 체험이 있는 사람은 결코 오늘의 환난이나 고난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주님이, 어제 내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한 내 기도를 응답하시고, 오늘도 약속의 말씀으로 지켜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체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체험은 항상 말씀의 근거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동력성은 말씀체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절망을 이기는 희망의 근거, 그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3. 기도응답입니다.
절망에서 바울이 주님을 구체적으로 체험한 것은 바로 기도응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응답을 경험할 때까지 우리의 신앙은 아직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은 울릴 때까지는 아직 종이 아닙니다.
노래는 노래할 때까지는 아직 노래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할 때까지는 아직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기도응답을 경험할 때까지는 아직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응답이 나의 믿음을 체험하게 하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일어서면서, 이 편지를 읽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중보기도를 부탁합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함이라”
물론 바울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전심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중보기도를 통한 기도응답의 확신에 찬 부탁으로 자기를 위해 기도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진정 감사하고 진정 희망을 나누게 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전도를 위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기도하여 주님이 소원하시는 세계비전의 같은 열매를 맺자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간 성경을 묵상하다가 이삭이 거부가 된 말씀 앞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창26:12-13절을 읽겠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창세기 26장을 보면 이삭이 흉년을 만납니다.
그래서 내려간 곳이 블레셋 땅입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경제적인 위기를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농사를 지었던 블레셋 땅은 그리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방인인 이삭에게 좋은 땅을 내어 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을 축복하심으로 그는 마침내 거부가 된 것입니다.
요즈음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힘들고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형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형통은 하나님이 맡기신 과업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형통은 악조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로 애굽에 팔려갔지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실 때 형통했으며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배우는 형통의 비결은 남이 안된다고 할 때도 잘되는 비결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성경적인 형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형통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모든 것은 배움을 통해 주어집니다.
형통도 마찬가지입니다.
형통의 비결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형통한 사람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우리가 보기 원하는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에 따라 우리의 보이는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형통하게 하시고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삼하7:9절을 보면 “네게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마28:20절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지속 반복하여 기도하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축복의 삶을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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