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아름다운 선택 (창세기 15:1-7)

Johnangel 2023. 5. 7. 23:55

아름다운 선택 (창세기 15:1-7)

 

여러분은 지금 지구촌에서 평균 연령이 가장 젊은 나라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지난 3년 전 통계에 의하면 베트남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는 인구의 61%가 30세 미만으로 형성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가 점점 더 고령화되는 것과 대조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해 가을 전장로님과 윤집사님과 더불어 베트남 사이공(현 호치민)근교에 선교답사를 위해 다녀왔었습니다.

베트남을 다녀오며 저에게 남겨진 가장 강렬한 두 가지 인상은 자동차들을 제끼고 도로 전체를 점유한 채 바다의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대한 오토바이들의 물결과 생동하는 젊은 인구들의 역동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이상으로 제 마음을 부풀게 한 것은 제가 만난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에서 자라나는 꿈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지금으로부터 30-40년 전 우리 한국인들이 가난했지만 꿈을 먹고 살던 그 시대의 젊은 한국인들을 연상시키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베트남 국민들은 사회주의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교학자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가 “2000년대의 가장 중요한 세계 변화의 한 특성으로 경제적 실용주의가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것”이라고 예언한 현장을 저는 베트남에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사는 것은 어떤 꿈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꿈이 어떻게 우리의 삶의 마당에서 우리의 욕심을 넘어선 하나님의 비전으로 실현되게 할 수가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비전의 도구로 인생을 사는 비밀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1.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비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두려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이 경제 대 공황에 직면했을 때,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두려움에 빠진 국민들에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오직 두려움 자체뿐이다”라는 그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 비전을 주시기 전에 그의 마음에 존재하는 두려움의 장애물을 먼저 다루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사실 본문의 배경을 형성하는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람은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연합군과 전투에서 기습공격을 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에 승리한 후 아브람은 자신에게 아직 자식이 없다는 것 때문에 적들이 언제 다시 전열을 정비해서 반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가 닫혀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창조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여전히 너와 함께 하고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너를 보호하고, 너의 상급이 되어 너에게 후사를 준다면 너는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 성도들이 두려움의 상황은 잘 인식합니다.

그러나 왜 나에게 두려움이 찾아오는가에 대해서는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우리 인생에게 두려움이 찾아옵니까?

바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마당에 두려움이 임할 때,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내 인생의 환경이 사면초가라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2. 그리고 구체적인 비전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아마도 처음에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약속하신 아들을 상속자로 주시려나”하고 막연하게 생각한 듯싶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반응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람은 자신의 하인 중에 지혜로운 종으로 이미 상속자를 결정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4절에서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붙잡고 일생을 살아 갈 비전을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시청각적으로 교훈하십니다.

어느 별이 빛나는 밤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그에게 하늘의 별을 세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별을 세어 보던 아브람은 별이 많아 셀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네 자손이 그와 같으리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비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미래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비전의 창출은 아브람의 “하나님, 무엇을 저에게 주시겠습니까?”라는 기도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빌 하이블 목사는 “기도는 곧 비전의 모태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에서 비전이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저는 비전과 야망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적 야망은 단순히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성경적 비전은 우리의 기도에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꿈꾸지도 계획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그로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며 억압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는 출애굽의 비전을 잉태하게 됩니다.

느헤미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국의 꿈도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조국 예루살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비전으로 그 가슴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맏음의 가족 여러분!

단순한 인간적 야망으로 여러분의 인생의 길을 걷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그냥 여러분의 마음의 충동을 따라 가십시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창조주가 설계하신 최선의 인생을 갈망하신다면 엎드려 하나님의 인도를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구제적으로 성경적 비전을 받고 싶으시다면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하나님 내게 무엇을 주시겠느냐?”고 구체적인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신 아브람이나 모세나 느혜미야와 같은 놀라운 기적을 반드시 여러분의 삶에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비전이 보이고 비전이 주어져도 그 비전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믿지 않으면 그 비전은 결국 몽상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비전을 잉태하는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셀 수 없는 하늘의 뭇별처럼 너에게 자손을 주시겠다”는 말씀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6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렇습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아름다운 미래의 그 꿈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들어 쓰셔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펼쳐나가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비전의 사람들을 우리는 비저나리(Visionary)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학자 “오스 기니스”의 말처럼 밤에만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낮에도 꿈을 꿉니다.

그리고 진정한 비저나리들은 비전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그 비전을 출산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바로 비전의 주인공들이 되고,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집니다.

비전을 갖고 사는 사람과 생존만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비전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생존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을 목표로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인생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인생이 오래 사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와 모델은 달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모델이 예수님이시라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래 사신 분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에서 짧은 삶을 사신 예수님을 누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 구원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는 요12:24절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열매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꺼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선택은 죽음의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비전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으심의 결과로 구원받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분의 삶의 성공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요한은 우리 모두가 역사의 한 날 그분의 성공을 궁극적으로 선포하는 놀라운 축제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계7:9-10절을 읽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그 날의 축제에 우리도 가슴 설레는 증인으로 서기 위해 비전의 사람이 되는 꿈을 꾸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인생을 사는 이유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고현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다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비전의 인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생존의 인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예수님의 세계비전이 나의 비전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확장을 위해 전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의 이 땅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