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19:8-22)

Johnangel 2023. 5. 10. 22:50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19:8-22)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광야의 한 로뎀나무 아래에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제 그만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제단에 불을 내리게 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었던 능력의 선지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큰 능력을 행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었지만, 왕비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의 마음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절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제 이 땅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불러 세 가지 일을 명령하십니다.

첫째, 너는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으로 세워라.

둘째,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라.

셋째,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의 후계자로 삼아라.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엘리야는 호렙산을 내려옵니다.

왜냐하면 이제 이 세상에 자신이 살아야 할 분명한 목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와 이유를 잃어버리면 죽은 자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의 삶이 아무리 구차하고 힘들지라도 내가 살아 있어야 할 분명한 목적과 의미와 이유가 있다면 절대로 자포자기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난 속에서도 자신이 살아야 할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세 번째 선교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모아놓고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그 부흥회에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역사가 일어나 병든 사람들이 낫고,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쫓겨 나가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두란노서원”이라는 성경학교를 세우고 2년 동안이나 말씀을 담대히 가르쳤습니다.

 

11-12절을 보면 그때 일어난 역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그렇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의 몸에 얹으면 병이 나았고, 귀신들린 사람의 몸에 갔다 얹으면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을 통해서 그런 놀라운 역사를 본 자들 가운데 마술을 행하던 어떤 유대인이 자신도 바울처럼 해보고 싶어서 바울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고 모방하여 소리쳤다가 오히려 귀신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술을 행하던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더 이상 마술을 행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후 마술할 때 쓰던 책을 다 모아다가 바울 앞에서 불살라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불사른 마술과 관련된 책이 은 오만 데나리온에 해당되는 양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은 오만 데나리온을 요즘으로 계산하면 아마 몇 억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이것은 당시 “에베소에 마술이 얼마나 성행하고 있었는가?”하는 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그런 놀라운 부흥의 모습을 20절에서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그렇습니다.

바울을 통한 부흥의 역사가 흥왕하여 꺼질 줄 모르는 불길처럼 에베소 전체를 휩쓸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어쩌면 바울의 생애에서 최고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에베소에서 평생을 목회하고 싶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바울은 세 차례의 선교여행 때문에 몸이 몹시도 피곤하여 지쳐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떠돌이 나그네와 같이 생활하며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에베소에 머물면서 교회를 돌보는 일에 남은 생애를 보내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부흥하고, 에베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또 다른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와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까지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다는 것은, 황제가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세계의 심장부인 그 로마에 가서 황제가 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외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에 가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먼저 들러야하는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도 형통한 길이 아닙니다.

생명의 위험이 있고 고생이 있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 장인 행20:23-24절을 보면, 바울이 밀레도에 이르렀을 때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 오도록 초청하여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중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렇습니다.

바울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바울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에 그까짓 환난이나 결박당하는 것은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왜 이런 고생을 사서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더 귀한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음을 그는 너무나도 철저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친히 빌3:7-9절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렇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학식과 세상적인 지위와 명예와 사회적인 평판 등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게 된 이 복음보다 소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것도, 그리고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 가려고 하는 것도, 모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그 길을 갔던 것입니다.

아마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보다 더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란노서원”에서 제자들을 양육하면서, 에베소 교회를 얼마든지 더 부흥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꿈과 열정은 에베소라는 한 도시 안에 그를 갇혀있을 수가 없게 했습니다.

그는 세계를 바라보았고, 세계 열방을 향해 가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준 꿈이요, 비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꿈과 비전이 바울의 삶을 고생의 길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울로 하여금 살아 있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비전과 꿈을 위해 사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이겨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겨납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반드시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갔던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율법을 훼방한 사람”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붙잡히게 됩니다.

사도행전 23장에 보면,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 40명을 중심으로 “바울을 살해하겠다는 결사대”가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내내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죄수의 몸으로 로마 황제에게 끌려가던 도중 지중해를 건너갈 때에는 큰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런 고난과 어려움이 그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을까요?

그에게는 복음을 향한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었고, 그 꿈과 비전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신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세계의 심장부였던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비전과 꿈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비전이 있는 사람은 보혜사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기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의 역사는 청교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620년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원주민들만 살던 그 땅에 기독교 국가를 세우기까지 그들은 엄청난 시련과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들어온 지 200여 년이 지난 1845년에 미국에서 침례교단이 창설되었습니다.

그 침례교단이 창설될 때 교회지도자들이 모여 처음 미국으로 건너왔던 청교도들의 신앙을 평가하면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었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사람들이었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믿을 수 없는 것들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낸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힘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의 우리 고현교회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제가 만든 작품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제의 삶이 오늘의 우리 교회와 나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은 “내가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믿으시고 보다 나은 내일의 우리 교회와 나와 내가정과 우리 후손들의 삶을 위해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바울처럼 발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