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사랑의 확증 (로마서 5:1~11)
현대 사회에는 많은 종류의 보험이 있습니다.
“생명보험, 건강보험, 교육보험, 노후연금보험” 등 많은 종류의 보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보험을 드는 것일까요?
보험이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보증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보증수표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금이나 다름없는 가치를 가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험에 들어 있거나 보증수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든든합니다.
왜냐하면 믿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듭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보험보다, 은행의 보증수표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하나님 사랑의 최종 확증이라 볼 수 있습니다.
1-5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결과”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 보증수표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우리를 향한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롬5:6절 말씀은 성경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구절 가운데 하나로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요3: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걷게 하려 하심이라”에 대한 사도 바울의 주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알면 알수록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랑스런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와 부활로 확증되었는데, 이 두 가지를 경험하면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런 질문을 하실 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지금 나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돈과 양식이 필요하며 사업이 잘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도와 주셔야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엉뚱하게 2000년 전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이나 부활사건이 나에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의 사업이 잘되고, 자녀가 잘되고 건강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맞지요?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십자가 하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감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을 하면서 결혼의 증표로 대부분 금으로 된 반지나 목걸이 등을 예물로 주는데 “금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당신을 영원히 변하지 않고 사랑하겠습니다”라는 뜻으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은 십자가입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의를 확증해 주셨고, 영생의 길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면 곧 십자가요, 십자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였습니까?
1.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여기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라는 말은 “진노 아래 있을 때”에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고 난 후부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아무 보잘 것 없고, 멸망의 자식으로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라는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여 주셔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여기 “때”라는 말은 “사람이 자신을 구원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을 때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1400년 가까이 율법을 소유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3장에서 지적한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였느냐?”하는 것과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느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열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됩니다.
롬8:31-32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증인이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여기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집사님이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할 때, 바울은 그를 죽이는 일을 찬성하고, 돌로 쳐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는 자였습니다.
그때 만약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벼락을 내리셨다면 그는 거기서 아주 지옥으로 가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바울을 봐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울이 전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를 때에도 하나님의 눈은 그를 향하고 있었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식을 언제부터 사랑합니까?
어떤 부모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을 지어놓고 이런 자식이 태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잉태하여 배속에 있을 때부터 얼마나 사랑합니까?
그리고 태어나서 철부지였을 때도 역시 사랑으로 길러줍니다.
철이 들어서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릴 때부터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연약할 때, 부족할 때부터 이미 사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기 이전에, 이미 연약할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엡1:3-6절을 읽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부터 사랑하여 주셨다고 말씀하십니까?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2. 하나님은 우리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 “때”는 시간적인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의 때”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의인일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를 부르러 왔노라”
여러분, 건강한 자에게 의원이 쓸데 있습니까?
아마 모든 사람이 다 건강하다면 병원은 문을 닫아야 되고, 의학대학교도 폐교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에게 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이 들면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 진찰을 받고 치료를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죄로 병든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려고, 자신이 직접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우냐? 선한 일을 했느냐 못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의를 많이 행하였으니 더 사랑을 받고, 죄를 지었으니 버림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딛3:3-5절을 보면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철저하게 깨닫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어떤 죄인이었던 여인과 바리새인 시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음식을 차려 놓고 주님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감사하여 눈물을 흘리며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붓고 발아래 엎드려 그녀의 머리로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시몬은 그 여인이 주님께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습니다.
이때 주님은 두 빚진 자의 비유를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눅7:47절을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죄인 됨과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실 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아무리 귀한 것을 드려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지 못했고, 자기의 빚짐과 자기의 궁핍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주님을 자기 집에 초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발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의인이 되었기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3.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사랑하셨습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과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는 방향을 전혀 반대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어떤 중간 지점이 아니라 아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바울의 예를 또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는 국내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죽이는 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외국까지 원정대로 파견되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울을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야말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사울은 정면으로 하나님과 원수로서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수인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원수인 내가 하나님과 화목되었다는 사랑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위치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가끔 의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롬7:24절에서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될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한 사람을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한 교회에 말썽꾸러기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였으며 성격이 난폭했습니다.
어느 날 주일학교 교사가 불쌍한 소년에게 옷 한 벌을 선물했습니다.
며칠 후 소년은 이 옷을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습니다.
교사는 그에게 다시 새 옷을 사주었습니다.
이번에도 몇 번 입어보더니 휙 던져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주일학교 교사에게 “저 아이는 구제불능입니다. 더 이상 사랑을 쏟을 필요가 없어요”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교사는 소년에게 세 번째로 좋은 옷을 선물하며 “네가 옷을 버리는 것은 용서한다. 그러나 교회출석은 계속한다고 약속해다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 말썽꾸러기 소년은 예수를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로버트 모리슨목사입니다.
그는 중국 선교사로서 “영․중국어사전”을 집필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비록 문제아였고 말썽 꾸러기였지만 주일학교 선생님의 열렬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꼭 필요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내가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하는 확증을 가지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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