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말씀과 믿음 (요한복음 4:46~54)

Johnangel 2023. 5. 12. 18:56

말씀과 믿음 (요한복음 4:46~54)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과 본래 상관이 없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그 인생의 위기를 극복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가 왕의 신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헤롯 안티바스의 고위층 신하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지금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이 가진 권력, 재력 그리고 영향력을 총동원해서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모든 노력했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에게는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죽음의 징후만 더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절대 절명의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전에 갈릴리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예수님이 다시 오셨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 소식은 왕의 신하에게는 마지막 잎새 같은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이 희망을 근거로 그가 믿음으로 예수께로 나아왔을 때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위기가 기적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54절을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 이 위기를 예수님을 만나 기적을 경험한 이 아버지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1.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입니다.

 

이 아버지의 믿음의 시작은 기적을 바라던 표적에 매달린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모든 치유수단이 아들을 살리지 못하던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아버지의 믿음은 그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아들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절실한 필요”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아버지에게는 자기 아들을 살릴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에게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 나아와 아들의 질병을 고쳐주시기를 매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47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그런데 이런 간곡한 호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냉정하기만 합니다.

4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책망이 이 아버지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오히려 이 아버지로 하여금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한 도전이요, 자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은 믿음의 출발로서는 수용될 수 있지만 결코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왕의 신하는 예수께서 자기 아들의 병상까지 내려와 자기 아들의 이마에 손을 대시고 기도하셔야만 행여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은 원시적이고 미성숙한 믿음의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런 유형의 믿음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믿음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은 시작으로서 필요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 이 왕의 신하에게는 다음 단계의 믿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기적이 이런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위기에 처해 계십니까?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희망이 필요하십니까?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믿어 보십시오. 그분에게 표적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이 유치하지만 기적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위기는 믿음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음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왕의 신하가 보여준 믿음의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2.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기대를 알아차리지 못한 왕의 신하는 또 한번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49절을 읽겠습니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때 예수님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아들이 아파 누운 곳으로 내려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말씀으로만 선포하셨습니다.

50-5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있다 하거늘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그의 아들의 병상에 내려가 그의 이마에 손을 얹으시고 안수하여 기도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아니하시고 그는 다만 치유의 말씀을 선언하시는 것으로 반응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저는 예수께서 이 반응을 통해 왕의 신하의 믿음의 성숙을 기대하신 것이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진정한 기적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표적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지하고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을 가르치고 싶어한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신하는 이런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숙함으로 반응하였습니다.

다시 5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여러분, 여기 믿음의 근거로 이제는 말씀을 붙들고 있는 이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왕의 신하는 이제 더 이상 자기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희망이 믿음의 근거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믿음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단순히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주관적인 기대치라면 그 기대치가 흔들릴 때 우리의 믿음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롬10:17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미성숙한 믿음과 성숙한 믿음의 차이, 기복적인 믿음과 성경적인 믿음의 차이는 믿음의 근거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믿음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아직도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희망이나 기대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십니까?

이 왕의 신하의 믿음은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에서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짧은 순간에 놀라운 믿음의 변신을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가 말씀을 붙드는 순간 결정적인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가슴속에는 이미 찬양이 샘솟고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이 아버지는 집으로 뛰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현대어 성경은 51절의 시작을 “그가 서둘러 집으로 가고 있는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기적은 이미 그의 아들뿐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바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그의 인생을 그의 발걸음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R.A.토레이 목사님이 성경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그는 대답하기를 “예, 제가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지요” “틀리지는 않는 말이네. 그러나 자네가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네” “뭡니까?”묻는 그에게 토레이 목사님은 “그것은 자네가 말씀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자네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순간 본문의 왕의 신하처럼 이 말씀이 우리를 붙들어 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가족을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53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빛은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살아 계신 주님의 일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도 숨기워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간증은 가장 가까이서 간증의 실제를 목격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영향력의 가장 실제적인 결과가 가족 구원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가족들을 주님께 나아오게 한 이 기적의 놀라움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주님의 역사하심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왕의 신하의 처음 요청처럼 그의 아들이 누워있는 곳으로 찾아가 기도하시지 않고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그냥 말씀으로만 “네 아들이 살았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에 있었고, 이 왕의 신하의 집은 갈릴리의 북쪽인 가버나움에 있었는데 거리상으로 25km 이상 떨어진 곳입니다.

길이 불편한 산지이기 때문에 걸어서 6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 왕의 신하가 믿고 자기 집으로 내려가던 중에 자기 집에서 주인을 만나러 오고 있는 종들을 만나게 됩니다.

종들은 주인의 아들이 열이 떨어지고 살아났다고 보고합니다.

주인이 그 시간을 물었을 때 종들은 그 때가 제7시(우리 시간으로 오후 1시)였다고 보고합니다.

그런데 53절에 의하면 그때가 바로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선언하시던 그때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가족들이 알았을 때 그 감격은 어떠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주님이라면 의지하고 따를만한 분이라고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날 이 가정이 경험한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인간 이상의 분이셨습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곧 메시야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실제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만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가족들이라도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없는 안타까운 순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가족들이 서로가 떨어져 있으면서 어려운 순간을 지날 때 걱정한들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그런데 이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우리를 묶어 주시고 도우시는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아는 가족의 행복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정의 위기가 오히려 가정을 기도로 묶어주고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나타난 이 왕의 신하의 가정처럼 말입니다.

아들이 죽어가던 이 위기 때문에 이 가정은 주님께 나올 수 있었고 주님을 신뢰함으로 함께 기도하는 가정, 그리고 구원받는 가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지금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분으로 믿으십니까?

오늘의 본문이 그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왕의 신하의 호소를 들으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던 예수님, 그분은 오늘도 여러분과 제가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수만 있다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우리 가정 안에서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천년 전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질머지고 피흘리신 그분, 그리고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분은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의 우리를 돕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페쇄된 유배지에서 삶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는 오늘의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 신음소리가 하늘에 올려지는 순간 주께서는 그의 전능하신 사랑의 손을 펼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의 손길이 내리시는 거기에 기적은 일어납니다.

바로 그 기적으로 오늘의 고난을 헤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