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세월의 절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 (요한복음 5:1-9)

Johnangel 2023. 5. 15. 18:57

세월의 절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 (요한복음 5:1-9)

                                                

여러분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난치의 질병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에는 이런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최악의 난치병으로 38년 동안 고생하던 한 병자를 고쳐 주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오래 동안 질병을 앓고 있었든지, 내가 얼마나 오래 동안 문제 가운데 있었든지, 내가 얼마나 오래 동안 절망가운데 빠져 있었든지, 그것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는 예수님을 만나면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우리는 모두 자력으로 치유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들은 모두 다 당시의 의학수준으로는 치유가 불가능의 병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주인공인 38년 된 병자의 절망은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접근하여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38년 된 병자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자력으로 치유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의 자력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 스스스로의 자력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 자력으로는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 자력으로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걸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자력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영적인 맹인이요, 영적인 귀머거리요, 영적인 앉은뱅이요, 영적인 혈기 마른 자들인 것입니다.

 

물론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은 분명히 위대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구원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무력하고 무능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은 영광의 존재이지만 동시에 비참한 존재”라고 했고, 칼빈은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구원 불가능의 존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역시 롬5:6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했습니다.

여기 “연약할 때”란 “무력할 때”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신의 구원에 관해서 전적으로 무력한 자리에 있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서 우리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행4:12절을 읽겠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인생문제의 해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2. 우리는 모두 은혜로만 치유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베데스다의 뜻을 아십니까?

베데스다란 “자비의 연못, 은혜의 연못”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실상 여기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초청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를 보시고 그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절망을 고백하는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인 구원은 자력으로 얻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독특한 구원관의 본질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한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갖습니다.

자신이 선을 행하며 착하게 사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공을 닦고 덕을 세우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역시 그들이 갖고 있는 종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불신자들은 자기가 노력하여 얻는 것이 구원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 세상 풍조를 따라가고, 사주팔자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귀신에게 벌벌 떨며 부적을 이곳저곳에 붙이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영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한 자의 노력과 선행은 일시적인 외형적 변화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력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또한 사단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원수 마귀의 손에 포로가 되어 종노릇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만이 우리 인간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반드시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 우리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엡2:8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따라서 우리는 모두 이 은혜로만 구원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기 38년된 병자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보십시오.

7절을 읽겠습니다.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것은 분명히 절망의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와 있던 이 38년 된 병자는 자기 병을 고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이미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오랜 역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41:9-10절을 보면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게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답답해하고 있는 그 자리에,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그 자리에, 내가 실패한 그 자리에, 주님이 와 계신다는 것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는 주님의 기적의 치유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기 이 병자에게 찾아온 예수님은 이 병자를 보자마자, 그의 병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한마디 말로 자신이 그를 일으켜 세워 새 인생의 길을 걷게 하실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가 얼마나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우리를 붙들고 있는 절망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우리가 얼마나 물질문제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직장문제로, 사업문제로 가정문제로 어려워하고 있는지를 다 알고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요한복음에서 이것을 우리에게 증언하고자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초부터 계신 창조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우리를 모든 문제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인생은 반드시 이 예수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 인생이 죄사함을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우리대신 우리의 죄를 질머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 본문에 그려진 베데스다 연못, 그 자비의 연못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사람들은 반드시 양문을 통과해야만 했었다는 것입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양문이란 제사장들이 속죄의 제사에 사용할 양들을 몰고 들어가는 문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백성들은 자기의 죄를 대신하여 피 흘리고 죽어갈 그 어린양의 죽음의 사실을 믿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베데스다의 연못에 나타난 예수님은 바로 우리 모든 인간의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요,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입니다.

요1:12절을 읽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의 안에 오셔서 언제나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이 스승이 되어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면 즉시 응답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요16:24절을 읽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이 풍성한 축복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은 완전히 좌절한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주님은 도우십니다.

38년된 병자는 연못에 들어갈 날이 올지 모른다는 실낱 같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작은 기대감을 발견하시고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힘든 고비를 만났을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기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절망스러운 처지에서 절대로 좌절하지 않고 승리하는 자들을 종종 봅니다.

 

미테랑은 1981년도에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뼛속까지 암이 퍼져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암 환자라는 소문이 나면 국가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상상할 수도 없는 정신력으로 병과 싸웠습니다.

그 결과 재선까지 15년 동안 대통령으로서 거뜬하게 자기 일을 다한 후 명예롭게 퇴임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도 이렇다면 예수 믿는 우리가 절망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절대 좌절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그런 사람을 도우십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전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주님의 사랑받는 신부가 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자녀로서 자존감을 회복하시고 도우시는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이 세상의 죄악과 생명을 걸고 싸워 승리하십시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