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주를 기쁘게 하는 자 (고린도후서 12:5-10)

Johnangel 2023. 5. 16. 22:17

주를 기쁘게 하는 자 (고린도후서 12:5-10)

                                              

사람에게는 누구나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정관념이란 일반적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런 고정관념이 굉장히 많이 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강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강한 힘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강한 것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 약한 것을 중심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고전1:26-27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여기 “택하사”라는 말씀은 “고의적으로, 혹은 일부러”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약한 자를 고의적으로 택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 가망성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이새의 아들로서 여덟 번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여덟 명의 아들 중에 제일 연약한 아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여덟 번째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에 비하여 부족하기 때문에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 아버지도 첫째부터 일곱째까지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은 소개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다른 형제들에 비하여 다윗은 부족함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들어 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면 쓰임 받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 여러분도 힘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자신의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로마서 전반을 보면 “우리는 완전히 죄인이다, 그러므로 소망 없는 존재”라고 하면서 철저히 우리들의 자아를 무너뜨립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무능한 인간이라는 한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각이 있기 전에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이라는 말 자체에는 “한계에 빠져있는 존재”라는 뜻이 있습니다.

 

먼저 신체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만 무리해도 우리의 육체는 병들고, 아프고 넘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사람도 사귀어 보면 독이 있고 섭섭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인간이구나”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성의 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운다 할지라도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이런 한계와 약점을 그대로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 가운데 보면,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고, 위기 가운데 빠져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과 위기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은 굉장히 겸손해 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위기를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은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지는 것이지,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까?

그것은 기름부으심으로 말미암아 보혜사 성령의 능력을 채우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자기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어떤 면에서 그 사람의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자기 약점을 자꾸 숨기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왜 자기 약점을 철저히 숨기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에게서 나올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약함을 드러내면, 아무 것도 자기를 가려줄 것도, 채워질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그런 이방인과 같은 삶을 살아갑니까?

우리는 채워주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큰 믿음이란,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게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내 신앙의 연조가 길지 않고, 내 경험이 많지 않고, 내 신학적 지식이 대단하지 못해도, 겨자씨와 같은 작은 믿음이라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믿음을 사용하면 태산이라도 옮겨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귀신은 떠나고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한계와 약점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위해 나아가는 첫 번째 발걸음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고후1:8-9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로 심각한 고난을 허락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고난이 임하든, 평탄함이 임하든, 무조건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대부분 언제 기도하게 됩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할 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게을러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믿는 교만함이 있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는 마음이 제일 좋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상한 심령이란, 주님 외에는 채워지지 않는 상하고 병든 심령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상한 심령을 가장 기뻐하실까요?

상한 심령을 가져야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수 있는 자세, 기도할 수 있는 환경,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최고의 축복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약함을 싫어합니다.

여러분, 약함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생글생글 웃는 얘가 예쁘지, 밤낮 질질 짜는 얘들은 예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묘한 것은, 그렇게 보기 싫은 그 약점 때문에 평생 겸손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시각으로는 보기 싫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 사람을 끝까지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약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다!”

저는 여러분들도 모든 연약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 임하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약하지만 강하게 쓰임 받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나도 약하지만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도 다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약한 나를 사용하신다면, 약한 그들도 사용하실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약함을 사용하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고 절대로 무시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강하다는 사람들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독선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무시하고 남들과 협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아무도 필요하지 않다, 나는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약함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약함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이런 약한 사람들끼리 하나씩 모여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루는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어떤 사람들의 모임입니까?

교회는 약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약한 자 위에 주님의 능력이 부어질 때에 “얼마나 큰일을 하는가?” 바로 그것을 깨닫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 동역의 능력과 기쁨을 체험하시는 고현의 가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의 뿌리를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16:16절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베드로의 고백과 다른 하나는 행14:14-15절에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두 고백의 공통점은 연약함을 토로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만이 최고”라는 고백 위에 가장 능력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쓰임 받기 위해서 이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를 함께 읽겠습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은 메마르고 가난 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를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들뿐입니다. 그들은 귀신에게 왜 묶여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이 고통인 줄 모르는 이들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고 우리가 서양귀신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지만 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조선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네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약함 중에 강력하게 쓰임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나의 주변의 연약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는, 저들도 능력 있게 쓰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협력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나는 예수 이름으로 보호받고 축복 받고 치유 받았음을 선포하노라”

“나는 이 세상에서 범죄하고 실수하고 넘어졌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았음을 선포하노라”

“나는 사탄에게 빼앗겼던 모든 권세를 예수 이름으로 이 지역을 정복하는 모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내 안에서 회복되어졌노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