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나눔의 공동체 (야고보 5:13-18)

Johnangel 2023. 5. 20. 23:46

나눔의 공동체 (야고보 5:13-18)

                                                    

본문 16절에 보면 “혼자서만 씨름하지 말고, 형제들과 짐을 나누어지고 같이 기뻐하는 나눔의 공동체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나의 아픈 마음을 내놓고 나눌 수 있습니까?

상대를 신뢰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상대를 신뢰할 수 있어야 기도제목을 나눌 수 있고,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아름다운 관계를 갖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롬15:7절에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서로 받으라”는 말씀은 “서로 용납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를 법대로만 다스리신다면, 우리 가운데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은 사랑의 관점으로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수준처럼 우리도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를 용서하며, 서로를 용납하고 받아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인생의 가장 보편적인 고난으로 본문에서 “육체적 질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3절에서 말씀하는 “고난”이라는 이 단어는, 우리가 인생의 장에서 경험하는 “온갖 유형의 재앙과 비극을 다 포함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길에 이러한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가 서로를 붙들어 주며, 서로를 용납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주님의 치유함을 받기 위해서는 나눔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나눔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1. 공동체에 대한 분명한 소속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가르쳐 “소속을 기피하는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시대의 문화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교회생활에도 영향을 끼쳐 소속없이 교회를 자기 편리에 따라 오고가는 현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최근 우리교회에서도 조사를 해보니까 주일날 출석하는 교인가운데 약 50%가 넘는 성도들이 목장모임이나 열린모임에 참여없이 교회의 공적인 예배만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평상시에는 이런 스타일의 교회생활이 오히려 편리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세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책임지지 않는 이런 스타일의 신앙생활에서는 진지한 영적성장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에게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주변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가 인생의 도상에서 위기를 경험할 때 그를 영적으로 도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여기서 장로들은 직제로서의 장로가 아닌 교회의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가 교회에서 소속이 없다면, 그는 어떤 지도자들을 찾아가실 수 있겠습니까?

현대인들은 한동안 소속이 없는 것을 자유로 오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알렉스 헤일리가 쓴 “뿌리”라는 작품이 전세계에 큰 반응을 일으키며 일어난 현대적인 운동이 공동체 운동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눔의 공동체야말로 우리 인간영혼의 뿌리요, 고향인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소속은 자유가 아닌 방황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언제까지 이런 방황을 즐기시겠습니까?

물론 완전한 가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완전한 교회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정이 없는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교회에서 목장가족에 대한 분명한 소속이 없는 성도의 모습은 가정없이 표류하는 영적 나그네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직면할 고난을 준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요즈음 많이 아프고 힘들어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겠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목장가족, 열린모임과 같은 나눔의 공동체에 소속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고백의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들은 다른 세속적인 공동체와 교회공동체를 구별하여 그 특성을 정의할 때, 교회공동체를 가르켜 “고백의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 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교회를 나의 교회로 선택할 때 “이 교회가 무엇을 믿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참된 교회생활은 “삶의 고백”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삶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어우러짐,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교제인 코이노니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제의 진정한 깊이는 교제의 장에서 우리가 얼마만큼 “자신의 삶의 실패와 허물을 진지하게 드러낼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상처가 드러남이 바로 치유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은 주일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의 모임에서는 이루어 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 때문에 목장가족 공동체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12명 이내의 사람들이 모여 자기 자랑하다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죄와 상처와 실패와 기쁨을 고백하는 자리, 바로 거기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하고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호신뢰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열고 무슨 얘기를 해도, 이 사람들은 나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나와함께 아파하며 나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여는 것은 언제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내면의 이야기가 동네 가십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장가족을 신뢰할 수 있는 가족공동체로 만들어 가야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목장가족은 “고백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어렵지만 서로를 신뢰하며 우리의 죄와 실패가 고백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임중에 임하시며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기적을 행하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질병이 다 죄로 말미암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질병은 분명히 죄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고백되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장벽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치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려면, 고백을 생활화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3. 믿음의 기도를 통한 치유를 믿어야 합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딕 이스트만(Dick Eastman)은 기도의 정의를 “기도의 단순한 행위는 유한한 인간을 무한하신 하나님께 연결시킨다. 인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고난의 상황은 변화된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인해 기뻐하시며,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믿음으로 의인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여기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는 의미는, 구원이란 “단순한 질병에서의 회복만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다음 구절에서 이어지는 약속처럼 “병든 자리에서 일어나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전도하여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는 사명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목장가족과 열린모임 공동체에서 이런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저는 설교의 결론으로 “엔젤라 헌트”의 한편의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우화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목은 “세 개의 나무 이야기”입니다.

어느 산마루에 세개의 나무가 있었는데 모두가 다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나무의 꿈은 그가 금으로 입혀진 보석함이 되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을 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나무의 꿈은 바다를 여행하는 군함이 되어 왕을 태우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나무의 꿈은 이 산마루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나무가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우러러 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나게 해주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나무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세 나무는 함께 모여 그들의 꿈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자주 함께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나무꾼들이 이 산마루에 올라 첫째나무를 짜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는 금으로 입혀진 보석함이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농부에게 팔려가 그의 외양간에서 소나 말을 먹이는 여물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실망했지만 믿음을 버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나무꾼들이 둘째나무를 짜르기 시작할 때, 그는 이제 바다를 여행하는 군함이 되어 왕을 태우고자 하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어부에게 팔려가 작은 어선이 되어 호숫가에 띄워졌습니다.

군함이 되기에는 그는 너무 연약했던 것입니다.

그는 실망했지만 믿음을 버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나무꾼이 셋째나무를 짜르기 시작했을 때 그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의 꿈은 거기에 그대로 남아 높고 아름다운 나무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느 목수에게 팔려가서 뒤뜰에 버려졌습니다.

그는 실망했지만 믿음을 버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수년이 흐른 어느 날, 말구유가 된 첫째나무에 세상에서 가장 보배로운 아기가 태어나 그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이 아기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리웠습니다.

호수에 떠다니던 둘째나무에도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의 배에 어느 날 한 분이 오르자 그의 제자들이 함께 오르게 되었고,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자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안심시키며 바다를 한마디로 꾸짖자 호수는 잠잠하게 되었고, 제자들은 그에게 엎디어 그를 주님과 왕으로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비로소 그가 왕중의 왕을 모신 배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수에게 팔려 그의 뒤뜰에 버려졌던 셋째나무는 어느 날 로마군인들의 청탁으로 십자가 나무가 되어 갈보리 높은 언덕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그의 나무에는 그의 친구인 첫째나무에서 태어나고, 둘째나무가 태우고 다니던 갈릴리 사람 예수라는 분이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원래의 꿈처럼 하나님을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세 나무의 기도는 모두 응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꿈은 오래 전 함께 모여 기도하던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난은 있었지만, 고난의 저 건너편에서 더 아름다운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주님을 섬기며, 또한 주님에 의해 쓰임받는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믿음의 가족 여러분!

우리도 또한 이렇게 세 나무들처럼 교회와 목장모임과 열린모임 공동체에서 서로 위로하며 서로 격려하며 서로 중보의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 고현의 가족들이 되어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대로 영향력을 가진 존귀한 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