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은 사람들 (열왕기하 5:1-14)

Johnangel 2023. 6. 5. 18:22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은 사람들 (열왕기하 5:1-14)

                                                    

우리는 가끔 주변에서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초월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 훌륭한 삶이다. 와 멋있다”라고 부러워하며 감탄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대부분 그렇게 초월해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은 지금 세계에서 12번째 경제 강대국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불평하고 행복하지 않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남아나 아프리카나 인도에 가서 그들의 삶을 보게 되면 그제서야 “아, 나는 너무나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구나!”생각하며 갑자기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형편과 처지가 갑자기 바뀐다할지라도 감사하지 못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형편과 처지가 되더라도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좋은 처지에 있는 옆 사람과 늘 자기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은 보지 않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만 보면서 불행하다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 갈 수 있을 까요?

 

1. 아람나라의 나아만 군대장관입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당시 아람제국은 중동근방에서 가장 큰 제국으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나라들이 쩔쩔매고 있었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아람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나아만은 아람제국의 국방장관으로 엄청난 세력가였습니다.

그는 아람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크고 존귀한 용사였지만 결정적인 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대에 문화 속에서 “저주받은 자”로 불렸던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절에 보면, “문둥병에 걸린 이방인 나아만을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이 전쟁터에서 싸울 때, 그를 통해 아람군대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 왕은 그를 더욱더 존귀한 자로 대우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아만이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출입을 주목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예수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특별은총을 받은 자로 하나님께서 한없는 은혜를 주시며 눈동자처럼 지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예수님을 믿을 때까지 관심을 가지시고 일반은총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감찰하시고, 일반은총을 통해 보편적 공의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이방 신들은 자기에게 갖다 바치는 자 외에는 결코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신이며 탐욕스런 신들입니다.

그리고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보복까지 서슴치 않는 매우 악한 신들입니다.

그래서 세상 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무서워 벌벌 떨면서 평생토록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치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놀라운 이적은 나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포로로 잡혀온 어린 소녀입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옛날에는 전쟁을 하면, 남자는 다 죽였고 여자와 아이들은 잡아가서 노예로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어린 소녀도 아버지는 죽었을 것이고, 어머니는 어디에선가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혼자 버려져 나아만의 집에서 수종드는 소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린 소녀는 얼마나 원통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이린 소녀는 3절에서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만약 나아만 장군이 이 소녀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에 가서 선지자 앞에 섰는데 낫지 않으면 이 소녀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처절한 처지가 있겠느냐?”싶은 이 어린 소녀가 자신의 처지를 초월해서 아름다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긍휼이 여기며 섬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소녀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주인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어린 소녀의 믿음으로 인하여 갑자기 어린 소녀는 훨씬 더 아름답고 위대하고 행복해 보이고, 아람제국의 나아만 장군은 졸지에 이 어린 소녀의 긍휼과 불쌍히 여김을 받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나아만은 어린 소녀의 말을 듣고, 자기 주인인 아람 왕을 찾아가서 어린 소녀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전합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여기서 우리는 나아만 장군의 간절함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문둥병이 고쳐지기를 간절히 소원했으면, 왕에게까지 찾아가서 자기의 어린 계집종의 이야기를 하였겠습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자신의 체면이 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있는 왕에게 그대로 고했습니다.

5절을 보면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 새 은 십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람왕은 나아만 장군을 참으로 귀하고 존귀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가까이 하기를 싫어하고 기피하는 문둥병환자인 나아만을 아람왕은 “네가 나을 수만 있다면 금 육천개라도 가지고 가라”고 말합니다.

이 모습은 몹쓸 병에 걸린 나아만이 그 동안 왕에게 얼마나 충성했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나아만이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왕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왕으로부터 이런 호의와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온 정열을 그 문제 해결을 위해 쏟아버립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자신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직분, 즉 군인으로서의 직분을 충성되게 감당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합시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선지자 엘리사입니다.

 

6-7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아람 왕은 나아만 장군을 이스라엘에 보내면서 많은 선물과 이스라엘 왕에게 외교서신을 통해 나아만 장군을 고쳐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약소국 이스라엘 왕은 “내가 하나님도 아닌데 어찌 고치겠느냐?”고 근심하며 강대국 아람 왕이 시비를 걸어서 전쟁하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양국 사이에 국가적 문제로 비약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사는 달랐습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벌벌 떨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선지자 엘리사는 담대합니다.

그래서 “왕이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사 선지자는 사람을 보내어 그 사람을 자기에게로 보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과 선지자의 차이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왕의 권세와 선지자의 영적 리더십의 비교를 보십시오.

얼마나 멋있고 당당한 선지자 엘리사입니까?

여기 선지자 엘리사 앞에 붙은 수식어가 아주 의미있습니다.

그냥 엘리사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입니다.

이 말에 선지자 엘리사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멋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보다 더 멋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엘리사는 그의 정체성이 분명합니다.

선지자로서 정체성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입장을 분명히 합니다.

그는 홀로 현실 도피적이고 환상적인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순간의 현실 앞에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을 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9절을 읽겠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나아만 장군이 군사들과 병거들을 이끌고 엘리사의 집 앞에 왔습니다.

그는 아람제국의 군대장관이고, 이스라엘은 사실상 그들의 식민지입니다.

그가 군대를 이스라엘 왕국 안으로 끌고 와서 마음대로 다녀도 이스라엘 왕국은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람제국의 국방장관이 초라한 엘리사의 집 앞에 군사들과 병거들로 무장하고 장군의 위엄을 보이며 서 있습니다.

군대장관 나아만과 어린 소녀, 군대장관 나아만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하나님은 이 극적인 만남을 통해 인생과 세계의 운명을 이끌어 가십니다.

10절에 보면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 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국의 군대장관이 위세 당당하게 대문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나가지도 않고 사자를 보내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씻으라”고 말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은 선지자 엘리사에 대하여 무엇을 느끼십니까?

교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엘리사가 교만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마음을 이미 읽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아만 장군이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는 문둥병을 치유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엘리사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엘리사의 당당함은 세 대결이나 기싸움 또는 심리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진정 나아만 장군이 치유되기를 원하여 그렇게 반응하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나아만 장군은 분노하여 두고 보자 하는 식으로 반응하며 뒤로 물러납니다.

사실 나아만은 생각하기를 엘리사가 문 밖으로 나와서 “장군님, 오셨습니까?”하고 정중히 맞이한 후 “여호와여 고치소서”이렇게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종을 보내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아만은 자기가 기대했던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분노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나아만의 장군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셔야합니다”라고 자기가 정해 놓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성도들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기대하고 정해 놓은 것과 다르게 응답이 오면,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라고 무시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섭리의 집행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순종하고 나아가면 축복이요, 하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기대했던 방법이 아니라고 거부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발로 차 버립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여러분은 자기 뜻대로 하나님께서 하시기를 요구하는 사람, 하나님께 자기의 방법을 강요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12-13절을 읽겠습니다.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노하여 떠나니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은 자기 나라에 더 깨끗한 강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강에 들어가 씻으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하며 분노하여 돌아서 떠납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는 영적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강물이 그를 씻어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순종이 치료하는 것이라는 영적세계의 원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나아만의 종들이 돌아서는 주인을 적극적으로 말립니다.

아마 그들이 주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단순한 감정으로 “장군님, 이 자를 당장 없애버립시다”말하며 나아만 장군을 총동하여 병거들과 군대들로 엘리사의 집을 쓸어버리고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들은 장군의 명예, 제국의 위상보다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주인 나아만 장군의 치유를 더 애타게 사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아만에게 “아버지여, 더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라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라고 간청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그릇된 일에 충동자가 되지 맙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선하심을 믿는 자가 됩시다.

그리고 주님의 축복을 기대하고 이적을 기대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됩시다.

여러분, 여기에서 말하는 더 큰 일이 무엇입니까?

예컨대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보화를 이만큼 밖에는 가지고 오지 않았소? 당신 병이 나으려면 보화를 마차 20개로 가득 싣고 와야지”라고 했다면, 아마 나아만은 분명히 자국으로 돌아가 그 보화를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은 이방종교 거짓선지자들이 늘 사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능력있는 사람들은 자기 능력의 대가로 치유되기를 원하는 심리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인데, 어찌 공짜로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느냐?”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치유가 되어도 자기가 잘나서 치유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주고받기를 하자는 그런 태도로서 인본주의 극치요, 교만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그런 사이비 선지자가 아닙니다.

후에 엘리사는 나아만이 갖고 온 작은 예물 하나도 받지 않았습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어린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 장군은 종들이 자기를 사랑하여 드리는 청원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종들의 말에 그는 아무 말 없이 순종합니다.

최고의 장군이 그 천한 종들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 하나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들이 주인을 낫게 했습니다.

아니 종들과 장군의 사랑과 신뢰가 치유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이적의 역사는 신학적 논리에 의해 기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의 인격적 만남에 의해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 사랑이 하나님을 감동케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 치유와 회복은 겸비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협력하여 하나님을 통해 만들어낸 이적과 축복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포로된 자신의 처지를 넘어 믿음으로 감사와 긍휼의 마음을 잃지 않은 착한 믿음의 소녀와 주인을 사랑하고 마음을 드려 섬기는 종들과 어떤 위험에도 오직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하며 소명을 다하는 영적 지도자와 주변 사람들을 애정을 가지고 돌아보며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소임을 다하는 장군입니다.

우리 고현의 성도들도 이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을 통해 이적과 기적을 만들어 내는 축복의 통로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