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교회생활이 즐거워야 할 이유 (로마서 5:1-11)

Johnangel 2023. 6. 12. 23:38

교회생활이 즐거워야 할 이유 (로마서 5:1-11)

                                                   

예수 믿는 우리의 삶은 우리의 환경과 상관없이 즐거움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매력이요, 간증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변증가이자 문학가인 씨 에스 루이스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의 핵심가운데서 기쁨이라는 단어는 대문자로 쓰여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대문자는 강조할 때, 중요할 때, 드러내고 싶을 때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있어 즐거움은 대문자입니까? 아니면 소문자입니까?

그렇습니다.

똑같이 어려움을 당하지만 환경이나 상황을 뛰어넘어 기쁨을 잃지 않고 누리는 삶이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해주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밖의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 속에서 누리는 기쁨을 통해 복음의 메시지를 듣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되는 공통적인 단어는 “즐거워하나니”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그 의미가 아주 강력하고 역동적인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즐거움은 내 마음속에 가두어 놓을 수 없고, 또한 이 즐거움이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외부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즐겁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1.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는 원래 의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그 결과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신분적인 관계가 새로워졌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구원을 얻는 데나 의를 행하는데 무능하고 연약한 존재였으며,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없는 경건치 못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 자기 맘대로 살던 죄인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도전하는 원수였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총으로 다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달은 사도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비록 전 세계 모든 분야의 중심지인 로마에서 그들이 숫자적으로도 적고, 가진 것도 없고, 신분적으로도 변변치 않은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22:6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있으리라”고 했고, 행7:55-56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즐거워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문화혜택과 더불어 풍요 속에 사는 우리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그 하나님을 믿고 그 영광을 바라보고 소망한다면 더욱 더 즐거워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2. 우리는 소망을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 “소망”은 천국이라는 단어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천국에 들어갈 약속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고 누릴 수 있는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믿지 않는 자들의 장례식은 다시 만남의 기약도 없고 내세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전혀 없는 장송곡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천국에 계신 주님 앞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약속과 소망이 있습니다.

물론 믿는 자들도 죽음 앞에서 이별에 대한 슬픔이 있고, 지난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의 죽음은 천국을 향한 새로운 출발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은 “죽어서 망했다”는 뜻의 “사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은 “영원한 안식”을 의미하는 “잠잔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약속하신 천국의 유업을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로 변화시키기 위해 죽음이라는 과정을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들의 소망은 이 지상에서 끝이 나지만, 우리 믿는 자들의 소망은 영원까지 연결되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인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정치적인 압박을 받았고, 로마제국의 황제숭배에 대한 종교적인 핍박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과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맹수의 밥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즐거워 할 소망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천국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둔 자들은 이 땅의 일이 끝나면 그 소망도 끝이 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 천국까지 소망이 연결되기에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소망을 확실히 붙잡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인간의 사랑은 상황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지면 변합니다.

심지어는 미움으로까지 변하기도합니다.

그래서 많은 소유의 물질 때문에 사랑을 받던 자들은 돈이 떨어지면, 사랑 받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하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의 변화에도 영원히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물론 사람이란, 누구나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자들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에 환난 속에서도 즐거워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환난은 우리 신앙인들의 부가가치를 높여 줍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자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앙생활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눈이 열린 성도들은 환난을 지나는 동안에 끼어있는 불순물이 제거되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도 100%의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욥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환난을 통과하면서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고현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통해 “예수 믿는 것은 정말 행복하고 즐겁다”는 이 분명한 사실이 더 넓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교회생활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중요한 요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항상 기뻐하는 모습으로 교회생활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자기 자녀가 원망과 탄식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내보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 대우를 받고 사는 우리 성도들 중에도 하나님의 이런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기쁨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하찮은 것들을 가지고는 마냥 웃고 떠들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모습은 믿는 자들 중에서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얼마나 크게 잘못된 일입니까?

롬8:17-18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도다”라고 했고, 요17: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것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3절의 “다만 이뿐 아니라”는 말씀은, 그 기쁨의 정도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성령님께서 말씀하시고 여러분을 만져 주심으로서 영의 눈이 열려 우리가 받게 될 참된 기쁨을 알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 삶의 모든 기쁨의 원동력이 되는 교회생활에서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여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