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우리 서로 격려합시다 (히브리서 10:19-25)

Johnangel 2023. 12. 24. 15:42

우리 서로 격려합시다 (히브리서 10:19-25)

                                            

오늘 본문을 목상하면서 저는 “믿음을 가진 후 고난에 직면해 있었던 1세기의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메시지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1세기이상으로 훨씬 더 복잡한 21세기를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격려가 필요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서로 격려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1. 격려의 규칙적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격려하고자 한다면, 우선 그 사람을 만나야합니다.

그리고 일회성의 만남이 아닌 지속적인 만남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규칙적인 특별히 행복모임, 목장모임과 같은 상황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주일예배를 통해 개인적인 격려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무서운 신앙의 핍박에 직면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당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비밀이 무엇입니까?

바로 집에서 거의 날마다 모인 교제를 통해 얻은 격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25절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1세기의 성도들보다 훨씬 더 복잡한 위기에 직면해 있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예수님의 재림이 더 가까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더욱 규칙적인 성도의 모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을 광야로 내보내시면서 그들을 공동체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공동체의 교제만이 광야의 위험과 고독에 대한 승리의 처방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광야의 행진에 가장 중요한 자산은 장막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행진을 멈출 때마다 장막을 둘러싸고 열두지파로 나뉘어 공동체생활을 통해 직면한 문제들을 토론하고 “힘겨운 문제들은 제사장으로 하여금 그 문제를 짊어지고 장막을 열고 성소 안에 들어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모임은 매순간 순간 그들에게 진정한 축복이었고 안식이었던 것입니다.

행7:38절을 보면, 이 광야의 모임을 가르켜 “광야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처음부터 “공동체”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교회는 “새 언약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2. 격려의 생산적 내용을 숙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임에서 나누어야 할 격려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때로 우리는 격려하기 위해서 모였다가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흔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이 목장모임을 회피하는 “이해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동차 사고를 경험한 직후에는 누구나 자동차 운전에 대하여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일수록 다시 자동차핸들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심리적인 상처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삶은, 너무나 불편해 질 것이고, 운전함으로 오는 많은 유익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임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모임을 거부하는 지혜롭지 못한 성도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목장모임을 생산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생산적인 대화의 내용을 서로 간에 숙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대화를 나누어야 할까요?

정치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성도의 모임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업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우리의 모임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대화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모임이 단순히 사람과의 만남만이 아닌 하나님과의 만남이 전제된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성도의 모임의 세 가지 중요한 관심의 주제를 서술합니다.

그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22절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23절은 “소망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소망 없이 우리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4절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사랑 없이 우리의 모임은 의미 있는 모임으로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일 때마다 믿음을, 소망을, 그리고 사랑을 격려하는 것을 숙지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3. 격려의 성경적 모범을 학습해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습관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서점에 가서 보면 “성공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습관”이라는 이런 유형의 책들이 적지 않게 매장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르면서, 어린 시절에 공부하는 습관, 교회 가는 습관, 기도하는 습관, 절약하는 습관, 이웃을 섬기는 습관 등을 가르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 안하는 습관, 교회 안가는 습관을 먼저 학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선배들에게 “좋은 습관을 학습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안 좋은 신앙습관을 가진 사람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구와 함께 하느냐?”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되도록 목장에 좋은 목자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경우 우리 목장은, 바꿀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제공합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목장을 선택하십시오.

물론 그런 목장이 없겠지만, 어떤 목장에 갔더니 다른 사람 험담만 한다면 “미안하다.”고 인사하고 다른 목장으로 가십시오.

나쁜 영향을 분별하여 선택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5절에서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서 “나쁜 모범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격려의 좋은 모범은 무엇입니까?

 

우선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모범을 학습하십시오.

주님은 열두 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신 후 그들과 규칙적으로 함께 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나누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함께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랑의 본을 보이신 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이런 격려를 체험하며 제자다운 제자로 성숙할 수 있었고 마침내 그들을 통해 세상이 변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격려자이셨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 또 한 분의 위대한 격려자가 있다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그의 서신서는 격려의 메시지로 꽉 차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그의 인생에서 바나바를 만났기 때문이었다.”고 확신합니다.

그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다가 변화되어 나타났지만, 아무도 그를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때 바울을 믿고 그의 변화를 보증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목회하던 때에 교회가 부흥되어 일거리가 많았습니다.

이때 바울은 고향 다소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소까지 찾아가서 아직도 검증되지 않은 청년 바울을 믿어주고 “함께 일하자”고 격려한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그리고 세계선교의 지도력을 그에게 위임하고 조용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간 바나바는 그의 이름처럼 “격려의 아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격려를 받았기에 또한 격려의 사람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격려 받았던 바울은 위대한 격려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