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누가복음 16:19-31)

Johnangel 2024. 1. 22. 17:19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누가복음 16:19-31)

                                             

예수님께서 비유를 베푸실 때는, 우리에게 단순히 듣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듣고 순종하여 우리의 삶의 변화를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직접 말씀하신 것이며, 성경에서 지옥에 대해 가장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주는 말씀입니다.

 

1. 부자가 들어간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23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가 이 땅에서 삶을 다하고 나면, 반드시 가야하는 곳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천국과 지옥”입니다.

 

19절에 보면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자색 옷”은 겉옷으로써 “그가 외투를 자색으로 입었다”는 것은, 당시 그의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고운 베옷”은 속옷으로써, 당시에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값비싼 수입품입니다.

따라서 이 부자는 당시에 높은 신분을 가진 자로써,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를 베풀 정도로 큰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유한 삶이, 그의 삶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장면은, 그 부자가 죽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보면,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했고, 28절서는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탁합니다.

따라서 지옥이란, 참기 힘든 고통을 영원히 받는 곳이며, 부자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알아보고, 불꽃의 고통을 느끼고, 고민할 정도로 기억과 의식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2. 부자는 지옥의 고통의 현장에서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물 한 방울의 소원입니다.

부자와 물 한 방울은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는 이 땅에 있을 때 “물 한방울”의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자기 집 대문 옆에 앉아 구걸하던 거지 나사로를 귀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에게 관심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옥에서 지금 그런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것이 소원이 되었습니다.

 

부자가 지옥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은 “물 한방울”의 간절한 소원이 거절당한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자는 지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렸지만 그 누림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고, 가난한 자들과 나누지도 않았고,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만 누리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25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렇습니다.

나사로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난하고 비참했지만, 그 고난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인식하고, 내세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따라서 나사로가 당한 고난은, 축복으로 인도하는 통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주어질 때,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께 믿음으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범사가 너무 잘 되어서 하나님을 등질정도라면,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이며,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천국과 지옥은 서로 왕래하거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다시 말해서 “이미 기회의 문이 닫힌 후에는, 그것을 건너 뛸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27-28절을 보면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렇습니다.

부자는 이미 죽어 지옥의 고통 속에 있지만, 이 땅에 남아 있는 자기 형제들에 대해 애끓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제들이라도 이 고통의 자리에 오지 않게 하기 위해,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해달라고 소원합니다.

하지만 그 소원도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29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했고, 31절에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적은 때때로 필요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적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 하기보다는, 이미 우리 믿는 자들의 입술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부모, 내 형제, 내 친척, 세계열방에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그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복음증거에 소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깜짝쇼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면 “자기 형제들이 반드시 회개하고 주님을 믿을 것이라”는 부자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의 시간과 공간에서 복음전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상대적인 비교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의 배움이나, 소유나, 건강이나, 자녀교육 등에서 뒤지는 부분이 있으면, 스스로 위축되어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맙니다.

그러나 고후4:7절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보배이신 예수그리스도는 강력한 능력입니다.

따라서 나의 부족하고 연약함과는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은, 어떤 사람이라도 변화시켜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술을 열어 담대하게, 내가 믿고 신뢰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따라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이며, 영적인 축복의 통로라는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교에 물질과 기도로 후원하며, 보내는 선교사 가는 선교사가 되든지, 가는 선교사가 되는 것도 이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영혼구원을 위해 선교사역에 솔선수범해서 육체적인 노동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복음에 대한 확신과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은 행20:24절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여기 부자가 지옥에 가서 “우리 가족이나 친지들이 여기에 오면 안 된다.”고 소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분명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비전이요, 나의 비전이요, 우리 모두의 비전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는 물질과 기도로 “보내는 선교사가 되든지, 가는 선교사”가 되어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