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사 (로마서 1:28-32)

Johnangel 2024. 7. 8. 15:10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사 (로마서 1:28-32)
                                             
하나님께서 본능적인 인간을 방치해 두실 때, 그 결과로 나타는 첫 번째 현상은 우상숭배이고, 두 번째 현상은 성적타락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오늘 본문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28절 상반절에 보면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그노시스”는 머리로 습득하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으로 받아드리는 지식입니다.
즉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마음으로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
과학자라고 하면, 적어도 일반인보다 과학자적인 지식이 더 많은 사람을 말합니다.
의학자는 일반인보다 의학적인 지식이 저 많은 사람입니다.
예술가는 일반인보다 예술적인 재능과 지식이 탁월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 선택받은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오직 성경말씀과 기도뿐입니다.
그 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말씀을 제외시키고 기도만 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말씀을 배우는데 전혀 시간적인 드림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씀과 기도”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지라에 함께한 우리는 정말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이 땅에 하늘나라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목적인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앎을 통해 가능합니다.
성경에서 “앎”이란 “동거”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동거를 통해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을 알려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28절 중반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누스”는 “이성”을 의미합니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성입니다.
인간을 가리켜 이성적 존재라고 하는데, 이 이성은 반드시 양심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이성이 양심을 떠나면 무섭게 타락합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진리이신 하나님 말씀의 토대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작용합니다.
만약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타락하면 이성 역시 타락하고 맙니다.
타락한 이성은 동물과 같은 인간의 본성을 강화시키는 흉기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또한 28절에서 마음을 수식하는 “상실한”이라는 말은 “황폐한” 혹은 “타락한”이라는 뜻입니다.
즉 “상실한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황폐하고 타락한 이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절대로 “자신을 타락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극히 이성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때, 그들은 황폐하고 타락한 이성의 소유자들입니다.
타락한 이성을 가지면 어떻게 됩니까?
 
28절 하반절을 보면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도록 내벼려 두시는 것입니다.
29-31절은 타락한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방치될 때, 구체적으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스물한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스물한 가지를 묶어서 봅시다.
 
첫째는, “모든 불의” “추악” “사기”입니다.
우리말 “추악”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네리아”는 “부정”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타락하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불의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의를 말할 때 흔히 정치하는 사람들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데, 성경에 말하는 불의란 나의 유익과 안위를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의와 관련해 두 가지 사실을 마음속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거리로 나가 상대방을 향해 정의를 외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혼자만의 유익을 위해 불의해지려는 나 자신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자신과 싸워 이기지 못하면 밖으로 향하는 모든 구호는 공허한 헛구호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정의를 외친다 해도 한 사람의 인격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의를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 혼자의 유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것이 불의라면, 의라는 것은 “공생”입니다.
공생은, 내가 무엇을 만든다고 할 때, 이것으로 나도 유익을 보고, 이것을 소유하는 다른 사람도 유익을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탐욕” “분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삶이란 어떤 삶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삶의 모습 가운데 부정적인 모습들을 뜯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려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자기 변화가 없습니다.
자기 변화가 없을 때, 남는 것은 탐욕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묵상이 없고 주어진 말씀으로 자신의 삶에 적용함 없이 아무리 기도해봐야 그것은 탐욕을 위한 기도일 뿐입니다.
평생을 기도하는데도, 우리가 거룩한 모습보다 추한 욕심의 우리 자신을 마주하는 까닭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악의가 가득한 자” “악독이 가득한 자” “악을 도모하는 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금형과 똑같습니다.
금형이란, 그 안에 무엇을 집어넣든지 그 형태대로 만드는데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예를 들어, 국화빵을 만드는 틀에 고급 밀가루 반죽을 넣어도 국화빵이 되고, 최하급 밀가루 반죽을 넣어도 국화빵이 됩니다.
따라서 국화빵 만드는 틀에서 절대로 붕어빵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에게 악이 가득 차 있으면, 나 자신이 남이 아무리 선한 이야기를 해도, 내가 아무리 선한 것을 보아도, 그 선한 것은 모두 악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수군수군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당당하게 이야기 하지 못하고 남을 험담하고 비방할 때 소곤소곤 속삭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남의 험담을 나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에 대한 험담도 다른 누군가에게 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시기” “교만한 자”입니다.
“시기”라는 단어는 “열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열심은 좋은 것이지만, 우리가 잘못된 열심을 가지면 그 열심 때문에 실족하게 됩니다.
잘못된 열심은 경쟁을 낳습니다.
잘못된 경쟁을 하면 모든 사람이 시기의 대상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나보다 앞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경쟁자로 보지 않습니다.
자식이 잘되면 잘되는 만큼 기쁜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형제지간에 소송이 벌어지면, 피를 나눈 형제가 서로 경쟁 상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역시 서로 경쟁 상대가 되면 편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경쟁이 시기를 낳으면 심지어 살인으로 치달으며,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많은 사건이 시기로 임함임을 뉴스를 통해 목격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는, “살인”입니다.
상대방을 시기하면 상대방을 부정하게 됩니다.
칼로 찔러 죽이지는 않더라도 모든 사람 앞에서 그를 끌어내려야 직성이 풀립니다.
상대방을 깍아내려야 자신이 살아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만일 어떤 면에서 남보다 더 앞서는 부분이 있다면, 그럴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을 마음으로 살인하는 사기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하19:31절을 보면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와 사회에서 봉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열심으로 해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때에만 우리 마음에 시기가 없어집니다.
 
일곱째는,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 “우매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에 대한 성경의 각주를 보면 “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이성을 가지면 진리를 미워하게 되고, 그래서 진리에 우둔하고 우매해 집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어디를 가려면, 그 목적지를 양해 가는 길을 머리에 그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추진하려면 그 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방법을 세워야합니다.
이때 선하고 진실된 방법이 아닌 악한 방법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진리에 우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점검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 정직하고 선한지, 아니면 이와 같은 거리가 먼 것인지에 따라 이성의 타락 여부와 타락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여덟째는, “능욕하는 자”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브리스테스”의 원뜻은 “난폭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난폭한 사람입니까?
감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감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난폭하다”와 반대되는 단어는 “온유”입니다.

아홉째는, “부모를 거역하는 자”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을 겪는 가정이 많습니다.
고부간에 가정도 많습니다.
이처럼 많은 가정들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머지않은 장래에 나와 내 자식 사이에도 갈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부모와는 갈들이 있는데 자기 자식과는 평생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꼭 깨달아야 할 사실은, 내 앞에 부모님이 계신 것이야말로 자녀들에게 효도에 대해 가르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열 번째는, “배약하는 자”입니다.
이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누군가와 약속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약속한 말 속에 자기 인격을 담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약속이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인격이 배제될 때는 약속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나의 인격을 걸고서 한 약속을 내가 파기한다면, 스스로 자기 인격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손해되는 약속이라도 지킬 수 있어야 하고, 지키지 못할 때는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납득시키고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한 번째는,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입니다.
정이 없고 자비로움이 없는 사람, 즉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려 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물론 그 자신은 스스로 사랑이 있다고 할지 모르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병든 이기심일 뿐입니다.
집에 있는 수도에서 물이 나오려면 수원지와 파이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32절은 어떻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까?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탁한 스물한 가지 모습을 드러내고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죄인 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해보면 “나는 죄인이라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그들이 자기들만 타락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이성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옹호하고 그런 삶을 조장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로마서 1장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악에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흔들고 깨우십니다.
이때 우리가 걸어가게 될 삶의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한 다리는 예수님께 걸치고, 다른 한 다리는 세상에 걸친 채 본능적인 삶을 살다가 시련을 겪으면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계속 같은 삶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 주님을 위해 말씀을 붙들고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믿음과 관련되지 않은 모든 것을 제해 나아감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과 역사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